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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은 May 07. 2024

사랑하는 푼수


 사랑에 빠진 여자는 푼수가 된다. 글쎄, 걔가 내 메시지를 1 초만에 읽는다니까. 그렇게 방방 뛰다가도 순식간에, 걔는 나한테만 친절한 게 아닌 것 같아……. 입꼬리만큼이나 축 쳐진 음성으로 몇 시간이나 그 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 백만 가지에 대해 논하던 그녀는 또, 대박! 지금 우리 집 앞이래! 다녀올게!


 다시는 그 애를 만나지 않겠다며 나를 불러낸 그녀는 죄도 없는 어묵탕을 자꾸만 휘적댔다. 개 같은 놈. 애초에 다 어장관리였던 거야. 망할 새끼, 이럴 거면 그러질 말지. 저 소주 한 병을 다 들이켜면 속에 가득 찬 그 '개 같은 놈'을 밀어내 주기라도 하는 것마냥 줄기차게 들이붓다가도 전화 한 통에 벌떡 일어난다. 미안, 내가 다시 연락할게! 망할 새끼라며? 지금 가서 확인하게, 진짜 망할 새끼인지……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자주 술자리에 홀로 남겨졌고, 수화음 속에서 홀로 적막했고, 홀로 귀가했지만 그게 좋았다. 나는 사랑에 빠진 그녀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짝사랑의 달인도 나쁘지 않았다. 나야 원래 드라마든, 영화든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 주는 서브 캐릭터만 골라 사랑하는 지독한 서브병에 시달렸으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사랑할 수밖에 없는 푼수들을 붙잡고 말한다. 걔가 울리면 꼭 나한테 와.



 그녀들은 일대 다수의 애정에도 굴하지 않는다. 나의 그녀는 요즘 한 가수에게 푹 빠져 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이제 그의 소식을 마치 출가한 아들, 오빠마냥 떠들게 되었다. 엄마, 아들 보러 갔어? 그래, 엄마 오늘 아들 보러 왔다.


 그의 팬미팅 소식에 발 벗고 나섰다가 덜컥 당첨되고 말았던 날, 그녀의 손에 들린 우산 색깔은 그를 응원하는 팬덤의 공식 색깔이라고 했다. 주책일까 봐, 우산이라도 주황색으로 들고 왔지. 막상 도착해 보니 온통 그녀의 우산 색깔로 물든 인파에, 오히려 내 차림이 가장 별날 지경이었다.


 내게 짧은 파마머리란 마치 어느 정도의 경험치를 쌓으면 도달하는 만렙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느 나이대의 여성들이 같은 헤어 스타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자주 마주친 탓일 테다.

 최종 도달점처럼 보이던 그 헤어 스타일을 하고, 마주 보며 터트리는 그 웃음소리들은 질투가 날 정도로 싱그러웠다.


 호호, 나는 남편한테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고 몰래 왔지. 나는 이사하다 말고 뛰쳐나왔다니까, 지금쯤 그이 혼자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하하, 호호, 깔깔. 습한 공기를 밀어내는 폭발음이 톡톡 튄다. 줄을 서서 티켓을 받고, 상자에 손을 넣어 자리를 뽑는 수많은 손들이 환호하고, 탄식하고, 때로는 소녀처럼 비명 하고.


 엄마, 떨려? 응, 떨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주변의 편의점이나 찾았고, 돌아갈 기차 시간을 걱정했다. 시간 넉넉해. 만약 늦으면 막차 타면 되지. 막차는 너무 늦잖아. 그 열기들 사이에서 나의 그녀는 그다지 감흥이 없는 듯도 보였다.

 하지만 공연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던 순간, 주먹을 쥐어 파이팅! 하며 팔을 아래로 당길 때, 드디어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푼수를 만났다. 그 짓궂은 콧잔등을. 짝사랑의 달인답게 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보내 주는 순간이었다.



 공연 시간 동안 시간을 보낼 곳을 찾아 걷고 있을 때, 나는 또 다시 주황빛 그녀들을 마주친다. 하얀 백발로, 지팡이 대신 캐리어를 붙잡아 걸음을 지탱하며. 길 좀 물읍시다. 신한카드홀이 어디요? 쭉 직진하시면 돼요. 저쪽에 보이는 저 건물이에요. 호호, 고마워요……. 다 왔네, 정말 다 왔어. 걸음을 재촉하는 뒷모습들을 보며 예고 없는 사랑에 휘청댄다.


 그녀들은 오늘 저 홀 안에서 푼수처럼 악을 쓰고, 손뼉 치고, 깔깔 웃고, 함께 노래하고, 번쩍번쩍 손을 들어댈 것이다. 패션 코드는 주황색. 각자 소품 하나라도 주황색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별종이 되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는 주책이라는 단어야말로 별꼴이 된다.



 그녀를 기다리며 내가 놓친 푼수들을 생각한다. 그 애 때문에 몰래 컴퓨터 전원을 켜던 그 새벽을. 오늘 새벽에 걔랑 같이 게임한 여자애가 되고 싶어서 잠도 쫓던 중학생 여자애를. 걔는 어느 날 복도에서 떵떵한 목소리로 그랬다. 나는 머리 긴 여자가 좋아. 아뿔싸, 나는 그때 목이 훤한 짧은 머리였는데. 푼수 같은 여자애보다는 역시 청순한 게 좋아. 그냥 너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애를 좋아하지 그래?


 나는 사랑하지 않을 때 가장 단정하고 청순하다. 하지만 진짜 사랑스러운 나는 자존심도 없이 자꾸 문자하던 나. 도무지 기다릴 줄을 모르고 자꾸 뭐 하냐고 묻던 나. 사랑스럽게 지저분했던 나. 진짜 사랑에 빠진 여자는 늘 비명을 지른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들을 안다. 경박하게 목젓을 보이는 호탕함과 주저앉아 쏟아내는 지저분한 악들을. 힘껏 팔을 벌려 허리둘레를 가두는 몸짓을. 낮 시간 동안 치열했으나 해가 지면 그의 턱수염이나 잡아당기는 짓궂은 손가락을. 엘리베이터에서 파이팅 하던 그녀를, 환호하고 손을 뻗는 푼수들의 주책을.

 나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이 푼수들을, 마음껏 소리 지르는 이 푼수들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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