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못 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자주 저지른다. 어차피 저지를 거라면 조금 더 자신만만하게 저지르면 좋을 텐데. 멋도 없이 잔뜩 주눅 들어 있다가 상대가 한 눈을 팔 때 엎질러 버린다. 당황한 그가 엎질러진 것들을 바라보며 뭐야? 하고 물으면 어쩐지 머쓱해진 그녀는 어깨를 잔뜩 편다. 내가 그랬다. 왜. 가슴을 잔뜩 내밀고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는 학부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홀랑 반해 버린 선배를 똑똑히 바라보며 그랬다. 저 선배를 좋아해 버릴 거야! 뭐든 충동처럼 울컥 뱉었다. 그녀의 첫 캠퍼스 로맨스는 그렇게 저질러졌다. 아무래도 씨씨는 좀 그래. 매일 봐야 한다는 게 좀 그래. 너무 가깝고, 대낮의 나를 숨길 수 없다는 게 좀 그래……. 대학 진학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는 검은 모자를 자주 썼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웃을 때는 눈이 힘껏 휘어졌다. 웃지 않을 때도 눈꼬리는 살짝 아래로 향했다. 자주 웃어서일 것이 분명한 곡선이었다. 다른 애들한테는 잘도 인사해 주면서 그녀에게는 도무지 먼저 인사해 주는 법이 없었다.
아, 도저히 먼저 인사는 못 하겠어……. 실컷 엄살을 피우고도 이튿날이면 그녀는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그녀는 항상 먼저 인사하고, 그는 매번 손을 들어 보였다. 그것도 골반 부근에서 살풋. 그건 꼭 펭귄의 날갯짓 같기도 했는데, 그 애매한 인사의 고도는 그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한테는 잘도 손바닥을 보여 주면서.
그 선배, 네가 좋아하는 걸 아는 것 같아. 왜? 자꾸 너만 보면 도망가고, 웃다가도 정색하고, 손도 딱 저만큼만 들고, 걸음도 빨라지고.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게 싫은 건가? 부끄러운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라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먼저 가서 말 걸어 봐. 내가 고백하면 깜짝 놀라겠지?
하지만 그녀는 멀리서 살짝 들어 보이는 펭귄 같은 손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하얀 운동화가, 멀리서 터지는 명량함이 좋았다.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곡선 같은 그가 좋았다.
매일 웃음을 묻히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앞이라면 합죽이가 되는 입술은 약올랐지만 그 이상의 엄살은 부리지 않았다. 시커먼 옷을 입고 우르르 들어오던 높은 학번의 남자들 사이에서 터지던 무해함. 부드럽게 깨어 버린 무언가에 찔린 그녀는 그의 무표정 앞에서 엎지를 것이 없었다. 아마 무표정에서도 저지를 것들이 남아 있었다면 그녀는, 저 선배를 사랑해 버릴 거야! 라고 쏟아 버렸겠지. 그는 얼마 안 가 먼저 학교를 졸업했고, 그녀는 여전히 이것저것 저질러댔다.
그녀의 저지레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이어졌다. 걔랑 연락되는 사람 있어? 걔 어떻게 지내? 살아는 있어? 학부 생활 내내 열심히던 SNS 활동까지 접고,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을 온통 묻혀 놓은 지역을 소식 없이 떠났다. 둘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의 안부는 생사였다.
그녀는 몇 년간의 잠수로 엄살을 떨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을 들고 돌아간다. 이건 제 필명이고요, 이건 제가 만든 책입니다. 쓰고 만들었어요.
뜻밖의 소식과 등장은 부활과도 같았다. 책을 썼다고, 그동안? 벙찐 얼굴로 묻는 그들에게 그녀는 괜히 또 가슴을 펴 보인다. 그래, 내가 썼다! 쓰고 싶었다! 그들은 순순히 품을 열어 그녀의 작은 책을 쓰다듬는다. 그럴 줄 알았어. 뭔가 하고 있을 줄 알았어. 마음대로 부재하고 또 뜻대로 존재하는 그녀의 저지레를 환대로 수습해 준다.
신기하고 사랑스럽던 완성작이 습작으로 불리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책장, 바닥 구석, 손이 닿는 곳에 실존하는 그녀의 부재를 불신하지만 그녀에게는 진짜 부재가 찾아왔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것은 독서라기보다는 열등에 가까웠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것을 습작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수집했다. 그녀는 부재 속으로 침잠했다.
요즘도 글 쓰고 있어?
다음 책 언제 나와?
여전히 이어지는 환대는 이불속을 들췄지만 그녀는 털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재로서 자신을 지우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그녀의 부재는 늘 엄살이었다. 그녀는 토로한다. 그거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만들면 돼. 쓰고 만들면……. 그리고 그건 책보다는 엄살에 가깝지 않아? 엄살은 지금 네가 떨고 있는 게 엄살이지. 너 이러고 또 뭐든 갑자기 들고 올 거잖아. 아냐, 이번에는 진짜 못 하겠어서 그래.
잠적한 그녀는 또 무언가 저지르고 있다고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분명히, 반드시 그럴 거라고. 이번에는 진짜라고 악을 쓰던 그녀는 어느 순간 다시 활자를 주물럭댄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키보드를 부스스 두드린다. 혹시나로 일그러졌다가 역시나로 수습되던 얼굴들을 떠올리며 남몰래 저지른다.
조용하면 일단 안 된다고 외쳐야 해. 뭔가 저지르고 있는 거야, 사고 치고 있는 거야. 그런 우스갯소리처럼 그들은, 조용하면 일단 놀랄 준비부터 해야 해. 걔 또 뭔가 저지레하고 있는 거야. 엄청나게 저지를 거야. 마구 엎어 놓고 놀라게 할 거야.
사랑하는 타인의 확신이 그녀를 믿음직하고 짓궂게 만든다.
그녀는 원체 놀라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음식을 잔뜩 묻혀 놓고도 다급하게 지우기보다는 꼭 이것 좀 보라며 깔깔 웃는 사람. 두근댈 때면 좋아해 버릴 거라고 저지르던 사람. 매번 이번에는 진짜야, 말하며 두툼한 부재로 실컷 엄살 하고는 불쑥 나타날 사람.
조금 오래 부재중이었죠. 그동안 다시 책을 썼습니다. 이거는 제 실명이고요. 그리고 여기에는 당신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지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역시. 쟤 또 저지를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