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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는 소리

짧은 소설

by 세희





맡는 소리

윤세희 2025.10.12




봄이 되면 오는 종종 셔츠깃에 송홧가루를 묻혀오곤 했다.


나는 내 옷깃에는 붙지 않는 것이 왜 유독 네 깃에만 그리도 붙을까, 웃으면서도 툴툴거렸다. 나는 봄의 흔적을 몸에 묻히는 오가 썩 부러웠다. 나는 언젠가부터 '흔적' 따위를 내 몸이나 옷에 묻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직 잊지 못한 전 연인에게 쏟아야 하는 여분의 눈물이라던가, 지난겨울에 스치듯 다녀왔던 하룻밤 글램핑에서의 모닥불 탄내라던가, 설날에 먹고 온 엄마의 떡국 냄새라던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감정이나 계절이나 사물이나, 그 무엇 하나 한 스푼의 흔적이라도 나라는 존재에 남기는 인간이 아니었다. 해서 계절의 흔적이나 삼겹살집의 고기 냄새 같은 것들을 늘 묻혀서 현관을 여는 오가 부러웠다. 싹둑 잘라내거나 잘려나가는 나는 그런 오야말로 진정한 인간으로 보였다.


흰 셔츠 이곳저곳에 묻은 송홧가루를 베란다에 털어내다 내가 재채기를 하자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시던 오가 헛, 하고 웃었다. 그날따라 베란다를 가득 채운 하오의 햇빛이 따사로웠다. 이어서 셔츠를 터는데 또 한 번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런 식으로 나는 오의 옷자락으로,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거실 가득 번지는 공기 같은 그의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인정했다. 내게는 맡아지지도, 묻어지지도 않는 봄이 드디어 왔구나. 가루를 털어낸 오의 셔츠를 옷걸이에 걸며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네 옷으로 모든 걸 알 수 있어. 오가 갸우뚱하며 나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셔츠 자락 끝부분에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송홧가루를 털어내며 답했다.

난 강아지처럼 매일 네 냄새를 맡는다는 소리야. 그러면 알 수가 있단 말이야. 네가 오늘은 갈빗집에 갔다더니 술도 쪼금 마셨구나. 땀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일이 많이 고되었구나. 아, 그리고, 봄이 왔구나!

사람이면 다 냄새를 묻히고 오잖아. 너도 그러지.

아니, 난 안 그래. 난 아무리 맡아도 아무 냄새도 안 맡아져. 난 그런 사람이거든.


오의 셔츠를 옷장에 걸고난 뒤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는 내 말이 꽤 생소했는지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처음 들은 초등학생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여태 오에게 냄새나 흔적 같은 단어들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부모님에겐 정확히 받을 만큼의 사랑을 받고 드릴만큼의 사랑만 드리고, 남에게 정 같은 건 주지도 않고, 받을 일이 있더라도 왠지 모를 불편함에 늘 거부해 왔다는 조금은 비인간적인 나의 생애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설원 같은 마음을 원했다. 검은색 점이나 초록색 이파리 하나 없는 희부연 마음에, 나는 오직 부모님과의 사랑과 친구와의 우정밖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분노도, 슬픔도, 증오도, 동정도 두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다만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누군가 내 마음의 함을 열어보면 오감에 오류가 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도 냄새조차 맡아지지 않는 그야말로 무의 공간을 원했다. 그런 내게 오의 등장은 과거, 충격적일 만큼 두려웠다.

보고 싶어도 걸음을 억지로 돌리고 돌리고 돌리던 어느 날, 오는 발그레 열 오른 얼굴로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대뜸 소리쳤다. 왜 나 피해요! 그때 나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엉겁결에 덜컥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오는 내 말에 잠깐 말이 없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부츠 속 발가락이 오그라들던 추위 속, 오가 웃자 코트와 내복에 둘둘 싸여 목 졸린 채 뛰고 있던 내 심장이 그때 왈칵 경련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심장이 '쿵, 쿵' 뛴다는 것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 마음은 설원이 아니라 공백이었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 사람은 원래 자기 냄새를 못 맡아, 바보야.


말없이 그저 그를 보고 있었는데 오가 그때와 같은 웃음을 보였다. 햇빛은 여전히 베란다창을 담뿍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집에 올 때마다 네 냄새를 맡는데. 나도 그걸로 알아. 네가 오늘은 커피를 조금 더 진하게 타서 마셨구나. 아끼고 아낀다던 그 비싼 물감을 썼구나. 나가서 흙장난을 하고 왔구나.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멍하니 오를 보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이 누군가의 음성으로, 그것도 오의 목소리로 들려오니 막장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절절히 자극적이었다. 오가 베란다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검은 눈동자에 가득 담은 채 말했다.


나는 네 냄새가 좋아.


전에 느낀 적 없던 고요가 오와 나 사이에 퍼졌다. 내 심장이 오를 처음 본 그때처럼 왈칵, 피를 뿜었다. 그때와 같이 이가 부딪히고 발이 오그라드는 추위도, 두꺼운 울코트와 내복에 싸여있지 않았는데도 심장은 마치 무언가를 뚫고 나갈 것처럼 가열하게 박동했다. 내 냄새, 내 흔적,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서늘한 어떤 한순간 포기했던 그것들을 말하는 오의 입술은 처음 본 그때처럼 천진했다. 나를 빤히 보던 오가 흘러내리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곤 내 냄새, 를 맡으려는 듯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도화지 같은 고요 속에서 그저 오의 숨소리만 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무엇으로 둘러싸여있는 내 심장에 걸어오는, 제일 작으며 제일 선연한, 가늠도 되지 않는 한 움큼의 세월을 약속하는 소리.


맡고, 내쉬는. 맡고, 또다시 내쉬는. 맡고, 계속해서 내쉬는,

나를 맡는 소리.


나는 오를 보며 그 겨울처럼 엉겁결에 말했다.


아, 봄이 왔구나.


오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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