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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서 Jun 15. 2017

영화 ‘박열’, 네번째 이야기

살아 숨쉬는 현장

2016년 12월로 접어들자충무로의 낡은 사무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는 D-30, D-25, 크랭크인 날짜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한편, 나는 시나리오 번역을 모두 마친 후, 집에서 온종일 가네코 후미코 역할 준비에 한창이었다. 


책상 위에 후미코의 자서전과 재판기록, 시나리오를 펼쳐 놓고 수차례 같은 페이지를 되짚으며, 짧고도 치열했던 그녀의 삶의 궤도를 내 안에 새겨 넣고자 했다. 



어떤 날은 자서전을 소리 내어 읽어도 보고, 

어떤 날은 방안을 우왕좌왕하며 대사를 중얼거리고, 

또 어떤 날은 방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린 채 후미코를 생각했다.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분석한 <박열> 대본 노트]



후미코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싶었고만약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손을 잡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였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문경에 있는 그녀의 묘지에 가서 조용히 작은 산소를 바라보다, 겨울바람에 언 묘비에 잠시 내 손을 얹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후미코의 묘지 앞에 민들레가 홀로 피어 있어서, 씨앗을 불어 주었다]





두문불출했던 12월도 다 가고, 영화 <박열>의 첫 리딩 날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다. 막상 리딩 날이 되자 그동안 홀로 부둥켜안고 있었던 후미코라는 막중한 역할보다도 박열을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과또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사무실에 30분 일찍 도착한 나는 책상 위에 대본과 대본 노트, 펜을 꺼내어 보기 좋게 나열해 놓고, 하나 둘 도착하는 배우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윽고 사무실 문을 열고, 말간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들어선다. 한 손에 탄산수한 손에 대본을 들고 싱글 벙글 들어오는 이제훈 배우를 본 순간안되겠다어떡하지또다시 밀려오는 이 중압감본받고 싶었던, 팬이었던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어 보는 첫 리딩이자 첫 심판의 순간!! 그렇다... 나는 이 리딩을 심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 넘는 걱정이 도리어 약이 되었는지, 첫 리딩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리딩 중, 조마조마한 마음에 책 너머로 힐끗 훔쳐보았던 감독님의 얼굴에는 줄곧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었고, 그 미소를 보자 나 또한 안도가 되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첫 리딩이 끝나자, 이제훈 배우는 감독님께 “희서씨는 바로 내일 촬영 들어가도 될 정도로 준비 많이 하셨네요!” 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감독님은 껄껄 웃으시며, 잘할 줄 알았으니까 내가 뽑았지너희 둘이 케미가 아주 좋네!!” 라며 책을 덮으셨다. 


아아첫 난관은 패스했다...! 그제야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첫 리딩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의 대사를 들으며 소년처럼 웃고 계셨던, 그 누구보다도 첫 리딩 날을 기다려왔을 이준익 감독님의 따뜻한 시선 덕분이었다.


 20년 동안 홀로 마음속에 간직했던 이야기가 마침내 배우들의 말과 호흡으로 구현되는 순간들을 보시며, 2017년을 사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1923년 도쿄의 불덩이 같았던 청춘들을 떠올리셨으리라.     


첫 리딩으로부터 2주 후, 2017년 1월 9드디어 박열 촬영이 시작되었다하루 일찍 촬영지인 경남 합천에 도착해 준비를 했던 나는, 예상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 여섯시 반, 나는 스트레칭을 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차리고, 패딩에 몸을 단단히 싸맨 후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장비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스탭들, “안녕하세요!” “후미코 어서와!” 반겨주는 얼굴들, 난로 가까이에 모여 다음 씬을 체크하는 감독님과 촬영 감독님, 조명 감독님...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살아 숨 쉬는 현장. 긴장감과 설렘이 온통 뒤섞여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에너지와 유대감을 빚어내는영화 첫 촬영 현장이다

이 때, 먼발치에 흙과 땀에 흠뻑 젖은 홑겹 기모노를 입고, 얼굴과 가슴, 팔뚝까지 시커멓게 칠한 남자가 보인다. 박열 이다.      



첫 씬을 마친 이제훈 배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었다. 영하 8도의 날씨에 아침부터 인력거를 끌고일본인에게 짓밟히는 장면을 찍은 그의 눈은 피로감보다도 어떠한 독기가 느껴졌다. ‘대단하다... 역시 프로는 다르구나...’ 그의 눈빛을 보니, 다시금 나 자신을 향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다음 씬에서 후미코는 박열을 완전히 휘어잡고, ‘우리 동거합시다!!’ 힘차게 외쳐야 하는데, 저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구애를 할 만큼나의 눈은 후미코의 눈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을까


후미코 준비할게요~!!” 조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벌써요...?” 아아, 심장이 콩닥 콩닥 뛰는 소리가 옆에 있는 스탭한테까지 들리겠다. “여기 서 계시면 됩니다.” 촬영팀이 나의 위치를 마킹 한다. “<개새끼> 시 읽는 장면부터 갑니다.” 연출팀이 내 손에 ‘청년 조선’ 잡지를 쥐어 준다. 의상팀이 내 발에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겨 준다. 마지막으로 분장팀이 내 잔머리를 정리하고 분첩으로 마무리 한다. 


자 갈게요!!! 레디!!!!!” 


심호흡을 해 본다. 잘 할 수 있겠지? ...아니야!! 지금은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행동할 때이다. 후미코의 행동... 박열의 시를 읽는 행동그것에만 집중하자. 


“...액션!!!”


* 다음 편이 마지막 브런치입니다. 많은 응원 감사 드립니다! 

마지막까지 많은 구독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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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에서 '박열'의 신념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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