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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간이 MeganLee Jul 14. 2021

발렌시아 골목의 와인바

세르비아인 이반


스페인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빠에야(Paella)의 본고장 발렌시아(Valencia)에서 5일, 그 유명한 이비자(Ibiza) 섬에서 5일 해서 총 10일이다. 7월이지만 벌써 20도를 밑도는 으슬으슬한 날씨의 암스테르담을 뒤로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스페인으로 오니, 같은 유럽 대륙이라도 그 안에서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한적한 곳이든 바쁜 곳이든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기후와 언어, 사람의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곳으로의 여행은 언제든 좋다. 하지만 역시 북적북적한 서울에서 나고 자라 그런지 나는 도시의 경관에 여간해서는 감명받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큰 도시에 가면 주요 명소를 방문하기보다, 머무는 동안 혹은 다시 돌아오면 계속해서 방문할 수 있을만한 나만의 스팟을 물색하는 게 내 주요 관심사다.


스페인 생활 리듬에 맞게 느지막이 밤 10시 즈음에야 집에서 나와 와인 여러 잔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발견한 이곳, Vidrio Vacío de Novi Sad.  여러 거리가 겹치는 널찍한 공간에 테라스 자리를 내놓은 데에 비추는 분위기 있는 노란 조명이 내 발길을 이끌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서북부 유럽에서나 들을 만한 일렉트로닉 음악이 들리는 게, 보통의 스패니쉬 바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라, 주인이 누굴까? 


일단 앉아 메뉴를 보는데 와인 까막눈인 나로선 어떤 게 좋을지 알 턱이 없다. 일단 더우니 산도가 높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자 싶어 주인을 찾는데 이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짧은 머리에 짙은 눈썹을 한 남자가 다가온다. 나의 빈약한 스페인어를 주워 모아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 해야 하던 다른 곳들과는 달리 대뜸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는 이 분, 알고 보니 세르비아에서 왔다고 한다. 안주거리로 곁들일 음식을 보려고 메뉴를 훑는데 전부 낯선 이름뿐이다. 그중 토마토 테파나드(Tepanade: 빵이나 비스킷에 발라먹도록 만들어진 스프레드)처럼 생겨 만만해 보이는 아이바(Ajvar)와 주인이 침이 마르도록 추천하는 홈메이드 체바피(Cevapi)를 주문한다. 아이바는 벨 페퍼를 불에 구워 단맛을 한껏 끌어올린 후 갈아 만든, 남동부 유럽에서 인기 있는 음식이다. 꼭 세르비아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세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를 아우르는 유고 슬라비아 지역의 전통 음식이라고 보면 된다. 


저녁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은 되도록 천천히 준비해달라고 부탁한다. 빵에 아이바를 듬뿍 올려 먹으며 시작한 첫 잔은 바랐던 대로 상큼했고, 꽃향이 감도는 두 번째 잔을 지나 마침내 버터리하고 매끈한 풍미의 세 번째 잔을 마실 즈음 두 번째 요리가 나왔다. 체바피는 이 마지막 와인과 가장 잘 어울렸는데, 손가락 모양으로 빚은 기름진 고기 요리로서 그 맛은 바로 떡이 들어가지 않은 떡갈비의 맛이었다. 스페인에서 먹는 세르비아 음식에서 한국의 맛이 나다니, 왠지 재미있다. 


세바피(Cevapi)


그 새 엉덩이 한 번 붙일 시간도 없이 바쁘던 주인 남자는 그제야 우리와 잠시 대화할 시간이 났다. 고향에서 그는 IT 업계의 돈 잘 버는 사업가였다고 했다. 사업이 자라면서 돈은 모였지만 프로젝트의 규모와 액수가 커지면서 클라이언트의 기대치가 점점 높아졌고, 자신도 모르는 새 가족과 친구도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일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모든 걸 접고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발렌시아로 왔는데, 좋아하는 와인과 세르비아 음식을 소개하며 사는 단순한 삶에서 정말 큰 행복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돈 되는 사업을, 이전의 삶을 전부 버리고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날 수 있었을까? 이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현실감의 무게 때문에 짐 지워진 마음으로 듣게 된다. 딸린 식솔이 없기에 내 한 몸 돌보는 게 전부인 지금 내 상황에서도 "거리에 나앉기야 하겠어?" 하면서 직장을 박차고 나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집세와 생활비 같은 가장 기본적인 걱정에서부터 지금까지 나아지기만 해왔던 생활수준을 낮춰 살 수 있을지, 불확실한 이 새로운 일이 나에게 심리적 만족과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까지 더하면 도돌이표 찍듯이 "내가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게 맞나?"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발렌시아에 머무는 5일 중 세 번의 저녁을 이 와인바에서 보냈는데, 인생의 굵직한 선택과 그를 실천할 용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어주었다. 





출처 :

https://tobosnia.com/who-wants-to-try-the-real-cevapi-must-come-to-saraj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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