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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4편 부여夫餘 (2) #13

금와金蛙와 동명東明 (4/4)

by 잡동산이

금와가 동명의 뜻을 시험하고자 그를 우-가에서 마-가로 옮긴 것은, 부여 안에서 그러한 가들이 가지는 위치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뒤에 동명과 금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러 동명이 부여를 떠날 때의 모습에서 다시 보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단 이러한 가들에 대해 자료들을 통해 살피고서, 동명과 금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로 하지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은 군대의 일들이 있어 하늘에 제사지내며 소들을 죽여 발굽을 보고 좋은 일, 나쁜 일을 점치도록 하였다[N-4:①-⑤]고 적었습니다. 곧 부여 사람들은 소들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좋을지 아닐지 점쳤기에 러한 소를 기르는 일을 통해 우-가는 군대의 일들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 수 있었으며, 부여에서 높은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N-4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부여 사람들에게) ① 군대[軍]의(= 군대를 내는) 일들이 있자 ● (부여 사람들은) 또한 ② 천天(= 하늘)에 제사지내며 ③ 소들[牛]을 죽여 ④ (소의) 발굽[蹄]을 보고 ⑤ 좋은 일, 나쁜 일을 점치도록 하였는데, ⑥ 발굽[蹄]이 흩어지는 것은 ⑦ 나쁜 일이라고 하고 ⑧ (발굽이) 더하여지는 것은 ⑨ 좋은 일[吉]이라고 하였다. ⑩ 적들[敵]이 있어 ⑪ 여러 가들[加]이 ● 스스로 ⑫ 싸우는데, ⑬ (여러 가들의) 하호들[下戶](= 아래 가문들)이 ⑭ 모두 ⑮ 먹을 것들[糧]을 대니 ● (여러 가들이) ⑯ 그것들을 마시고 먹었다. ① 有軍事●亦②祭天③殺牛④觀蹄⑤以占吉凶⑥蹄解者⑦爲凶⑧合者⑨爲吉⑩有敵⑪諸加●自⑫戰⑬下戶⑭俱⑮擔糧●⑯飮食之


그리고서 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은 또한 적이 있어 러 가들이 적과 싸우면 그 아래 가문들이 먹을 것을 대었고 그리하여 여러 가들이 먹고 마신다[N-4:⑩-⑯]고 적었습니다. 여러 가들이 적과 싸우면, 먹을 것들, 마실 것들을 비롯하여 싸우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대는 것은 보다 아래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다른 구절들은 국國 - 국의 사람들 - 이 제사지낼 짐승들[牲]을 - 소를 - 잘 돌본다[N-5:①-②]고 적고, 부여가 이름있는 말들, 구슬들을 내었다[N-5:③] - 나서, 바깥에 내다 팔았다 - 고 적었니다. 곧 말은 제사에 쓰던 짐승들 곧 소와 달리 바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런 말을 러 싸움에 대던 마-가는, 먹을 것들을 대던 아래 가문들과 같이 부여에서 낮은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N-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① 그(= 부여-)국國은 ② 제사 짐승들[牲]을 돌보기[養]를 잘하였다. ③ 이름이 알려진[名] 말들[馬], 붉은색[赤] 구슬들[玉], 담비들[貂], 삵괭이들[狖], 아름다운 구슬들[珠]을 내었는데 ④ (아름다운) 구슬들은 ⑤ 크기가 ⑥ 대추[酸棗]와 같았다. ①其國②善養牲③出名馬赤玉貂狖美珠④珠⑤大者⑥如酸棗


이것을 통해 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구절들이 적들이 있어 여러 가들이 스스로 싸웠다고 적은 여러 가들은 구-가와 저-가 해당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실제로 싸움에서 드러나 움직였덛 것은 저-가였으니, 그들의 모습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이 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은 읍루가 옛날에는 숙신-씨의 국이었다[U-1:①]고 적고서 또한 한 때부터 그 뒤로 읍루가 신하 노릇을 하면서 부여를 따랐다[U-1:⑯-⑰]고 적었습니다. 곧 읍루는, 앞서 조선에 들어온 기-자의 가르침을 받고서 먼저 기-자를 뒤에는 기-자가 맡은 조선을 따랐던 예와 마찬가지로, 북쪽 숙신 가까이 와서 자리잡은 부여를 따, 숙신 가운데 1개 무리습니다.


U-1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 (읍루는) ① 옛날의(= 옛날에는) 숙신-씨[肅愼-氏]의 국國으로 ② 쏘기를 잘하여 ③ 다른 사람들을 (활로) 쏘면 ● (화살이) ④ 모두 ⑤ 눈에 들어가는데 ⑥ 화살이 ⑦ 독을 퍼트리니 ⑧ 다른 사람들은 ⑨ 맞고서 ⑩ 모두 ⑪ 죽었다. ● (읍루는) ⑫ 붉은색 구슬들[赤玉], 좋은 담비들[貂]을 내었다. ⑬ 지금 ⑭ 일러 (말하기를) 읍루-담비[挹婁-貂]라고 하는 바가 ⑮ 이것이다. ● (읍루는) ⑯ 한漢으로부터 그 뒤로[已來] ⑰ 신하 노릇을 하며[臣] 부여夫餘를 따랐는데[屬] ⑱ 부여가 ⑲ 그(= 읍루에게) 조[租賦]를 물리고 ⑳ (그 일을) 거듭하여 ㉑ 황초黃初 중 ● (읍루가) ㉒ 그[之](= 부여)에게 등돌리도록 하였다. ①古之肅愼氏之國也②善射③射人●④皆⑤入目⑥矢⑦施毒⑧人⑨中⑩皆⑪死●⑫出赤玉好貂⑬今⑭所謂挹婁貂⑮是也●⑯自漢已來⑰臣屬夫餘⑱夫餘⑲責其租賦⑳重㉑以黃初中●㉒叛之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의 다른 구절은 그러한 읍루 사람들 생김새가 부여 사람들의 생김새와 비슷하다[U-2:①-②]고 적었으니, 곧 읍루가 부여를 따른 뒤 와서 자리잡은 부여 사람들 때문입니다. 이어 읍루의 말, 이야기가 부여와 고구려의 말, 이야기와 같지 않다[U-2:③-④]고 적었는데, 읍루가 부여를 따랐던 MC-47[+2)에서 한참 뒤? 삼국지 위서가 적고 있는 시기가 되면 머물던 부여 사람들이 읍루와 깊이 어울려 그 말, 이야기가 읍루의 것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U-2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 ① 그(= 읍루) 사람들의 생김새는 ② 부여와(= 부여 사람들의 생김새와) 비슷하였고 ③ 말[言], 이야기[語]는 ④ 부여(= 부여의 말, 이야기), 고구려(= 고구려의 말, 이야기)와 더불어 같지 않았다. ● (읍루에는) ⑥ 5(가지) 곡물들[穀], 소들[牛], 말들[馬], 삼[麻]으로 만들어진 천들[布]이 있었다. ①其人形②似夫餘③言語⑤不與夫餘句麗同●⑥有五穀牛馬麻布


다만, 들어온 부여 사람들을 통해서 본래 그들이 하던 일들은 그대로 전해졌고 때문에 이어 5가지 곡물들, 소들, 말들이 읍루에 있다[U-2:⑥]고 적었습니다. 곧 이 때에 부여의 우-가와 마-가 사람들이 읍루에 들어왔던 것인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의 다른 구절들은 읍루 사람들이 돼지 돌보기를 좋아한다[U-3:①-②]고 적었으니, 저-가 사람들 또한 부여에서 읍루로 들어왔습니다.


U-3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 ① 그(= 읍루) 사람들[俗]은 ② 돼지[豬] 돌보기[養]를 좋아하여 ③ 그(= 돼지의) 고기를 먹고, ④ 그(=돼지의) 가죽을 입었다. ①其俗②好養豬③食其肉④衣其皮


앞서 살핀 바 적과 싸우는 부여의 여러 가들이란 저-가와 구-가였는데 그 가운데 읍루와 싸워 이겨 부여를 따르도록 하였던 것은 읍루에 머무르게 되었던 저-가였습니다. 다만 앞서 새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쓰던 무리가 졸본에 간 뒤 길이 끊어졌던 것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위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이 붉은색 구슬들, 담비들을 내었다[U-1:⑫]고 적은 붉은색 구슬들, 담비들에 대해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또한 붉은색 구슬들, 담비들을 내었다[N-5:③]고 적은 이 보여주듯 읍루와 부여의 길은 앞서 부여와 졸본 사이의 길과 달리 한참 뒤 황초 연간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가 또한 부여에서 높은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름을 남기지 못한 구-가는 공功을 세우지 못해 낮은 위치에 있게 되, 그 처지가 앞서 마-가의 처지와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부여가 북쪽으로 옮겨간 뒤 가까이 있던 숙신의 무리들 가운데 부여가 결국 이겨내어 따르도록 하였던 읍루와의 싸움이 시작되던 시기, 우-가, 저-가는 공을 세워 높은 위치에 있게 되었으며, 마-가, 구-가는 새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쓰는 무리와 함께 낮은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숙신을 깨트려 그 무리인 읍루가 부여를 따르도록 한 뒤부터 연호가 황초이던 때까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이 적은 대로, 읍루가 부여에게 등돌리고, 그 동북쪽으로 1,000리 남짓 떨어져 바다와 맞닿은 곳[U-4:①-④]에 자리잡던 때까지 그리하였습니다. 곧 부여가 북쪽으로 가서 동쪽의 읍루를 따르도록 한 뒤 서쪽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는 동안 계속 그리하였습니다.


U-4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읍루편: ① 읍루는 ② 부여의 동북쪽에 있다. ● (그곳은) ③ (부여에서) 1,000리 남짓을 가며(= 1,000리 남짓 떨어져 있고) ④ 큰 바다에 맞닿았다. ①挹婁②在夫餘東北●③千餘里④濱大海




그리하였기에 금와가 동명이 말을 키우도록 하여 곧 우-가 대신 마-가가 동명을 맡도록 함으로써, 위치가 낮아지게 된 동명이 분노를 품 되었던 것입니다. 동명왕편 주석이 이어 동명이 유화에게 일러 자신은 천-제의 손자인데 다른 사람을 위해 말을 키우고 있고 하였다[B-21-(2):①-⑤]고 적은 구절들이 보여주듯이, 이 때 동명은 자신이 천-제의 손자 곧 해모수의 아들임을 이미 알게 된 뒤였기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B-21-(2) 동명왕편 주석: <● (동명이) ① 어머니(= 유화)에게 일러 ● 말하기를 "② 나는 ③ 천-제[天-帝]의 손자[孫]인데, ④ 다른 사람을 위하여 ⑤ 말을 기른다. ⑥ 사는 것은 ⑦ 죽은 것과 같지 않지만 ● (내가) 바라기를 ⑧ 남쪽 땅으로 가서 ⑨ 국國, 가문[家]을 만들었으면, 하지만 ⑩ 어머니가 ⑪ (여기에) 있기에 ● (내가) ⑫ 감히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專] 않는(=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⑬ 그(= 동명의) 어머니가 ⑭ 운운.> <●①謂母●曰②我③是天帝之孫④爲人⑤牧馬⑥生⑦不如死●欲⑧往南土⑨造國家⑩母⑪在●⑫不敢自專⑬其母⑭云云>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유리-명왕에 대해 이야기하며, 처음 - 보다 앞서 - 동명이 부여에 있었는데 부여에서 예-씨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A-13;①-④]고 적었으니, 이러한 혼인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그 어머니 유화에게서 비로소 아버지가 천-제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것입니다.


A-1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처음 ② 주몽(= 동명)은 ③ 부여에 있었는데 ● (부여에서) ④ 예-씨[禮-氏]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①初②朱蒙③在扶餘●④娶禮氏女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명은 남쪽 땅으로 가서 국을 가진 가문을 만들었으면 - 왕이 되었으며 하지만 유화가 부여에 있으니 마음대로 그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B-21-(2):⑧-⑫]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주몽의 어머니라는 단어[B-21-(2):⑬]를 적고, 곧바로 운운이라는 단어[B-21-(2):⑭]를 - 말줄임표에 해당하는 것을 - 이어 써서 그 뒤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내용들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말들은 다른 동명왕편 주석이 적었습니다. 먼저, 유화가 동명이 자신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으로 속을 썩였음을 말하였다[B-22-(1):①-③]고 적고, 이어 유화가 먼 길을 떠나는 장사는 말[馬]의 발에 기대기 마련이라는 말을 전하고 자신이 말을 고를 수 있다고 하였다[B-22-(1):④-⑧]고 적었습니다. 이어 말을 기르는 곳에서 유화가 긴 채찍을 어지러이 휘두르자 달아나는 여러 말들 가운데 붉은색 말 1마리가 높은 난간을 넘어서는 달렸다[B-22-(1):⑨-⑰]고 적었습니다.


B-22-(1) 동명왕편 주석: <① 그(= 동명의) 어머니가 ● 말하기를 "② 이것(= 네가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③ 나의(= 내 가운데에서) 밤낮으로 마음을 썩도록 하였던 바다. ④ 내가 ● 듣기를 '⑤ 장사[士]의(= 장사 가운데에서) 먼 길을 건너는(= 떠나는) 이는 ● 모름지기 ⑥ 빼어난 말의 발에 기댄다.'라고 하는데 ⑦ 내가 ⑧ 말을 고를 수 있다."라고 하였다. ● 이윽고 (어머니가) ⑨ 말을 기르는 곳[馬牧]에 가서 ● 곧 ⑩ 긴 채찍이 ⑪ 어지럽게 때리도록 하니 ⑫ 여러 말들이 ⑬ 모두 ⑭ 놀라 달리는데 ⑮ 1(마리) 붉은색 말이 ⑯ 뛰어 2장 난간[欄]을 넘고 ⑰ 달렸다.> <①其母●曰②此③吾之所以日夜腐心也④吾●聞⑤士之涉長途者●須⑥憑駿足⑦吾⑧能擇馬矣●遂⑨往馬牧●卽⑩以長鞭⑪亂捶⑫群馬⑬皆⑭驚走⑮一騂馬⑯跳過二丈之欄⑰逸>


그리고서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그 말이 빼어나게 달림을 알고 바늘이 그 말의 혀뿌리를 찌르도록 하였으며 말이 물, 풀을 먹을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약해졌다[B-22-(2):①-⑧]고 적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유화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비슷하게 적었는데[A-8-(10):①-④], 여기에 더하여, 둔한 말을 잘 돌보아 살찌도록 하였다[A-8-(10):⑤-⑦]고 적었습니다.


B-22-(2) 동명왕편 주석: <① 주몽이 ② (그) 말의 빼어나게 달리는 것[駿逸]을 알고 ● 몰래 ③ 바늘이 ④ (빼어난) 말의 혀뿌리를 때리도록(= 찌르도록) 하니 ⑤ 그(= 뛰어난) 말이 ⑥ 혀가 아파 ⑦ 물, 풀을 먹지 못하여 ● 많이 ⑧ 파리해지고 야위었다.> <①朱蒙②知馬駿逸●潛③以針④捶馬舌根⑤其馬⑥舌痛⑦不食水草●甚⑧瘦悴>
A-8-(1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주몽이 ② 그(= 기르는 말들 가운데) 빼어난 것[駿者]을 알고 ③ (빼어난 말이) 먹는 것을 줄여 ④ (빼어난 말이) 마르도록 하고 ⑤ 둔한 것[駑者](= 둔한 말)은 ● (주몽이) ⑥ 돌보기[養]를 잘하여 ⑦ (둔한 말이) 살찌도록 하였다. ①朱蒙②知其駿者③而減食④令瘦⑤駑者●⑥善養⑦令肥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금와가 다스리는 곳들을 돌아보며 - 동명이 - 말을 기르는 곳으로 갔는데 여러 말들이 살쪄있으니 크게 기뻐하고 마른 말을 골라 동명에게 주었다[B-22-(3):①-⑧]고 적었습니다. 이 일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금와가 살찐 것은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동명에게 주었다[A-8-(11):①-⑤]고 간단히 적었습니다.


B-22-(3) 동명왕편 주석: <① 왕이(= 금와가) ② 돌아보며 말을 기르는 곳으로 움직였는데 ● 보니 ③ 여러 말들이 ④ 모두(= 참으로) ⑤ 살쪄있어 ● (왕이) 크게 ⑥ 기뻐하였다. ● 이어 ⑦ 마른 말이 ⑧ 주몽(= 동명)에게 내려지도록 하니 ⑨ 주몽이 ⑩ 그것(= 마른 말)을 얻어서 ⑪ 그(= 마른 말의 혀를 찌르는) 바늘을 뽑고 ⑫ 더하여(= 많이) (풀, 물을) 먹였다. ⑬ 운(운).> <①王②巡行馬牧●見③群馬④悉⑤肥●大⑥喜●仍⑦以瘦⑧錫朱蒙⑨朱蒙⑩得之⑪拔其針⑫加餧⑬云>
A-8-(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왕은 ② 살찐 것(= 말)은 ● 스스로(= 자신이) ③ 타도록 하고 ④ 마른 말은 ⑤ 주몽(= 동명)에게 주었다. ⑥ (그리한) 뒤에 ● (왕이) ⑦ 들[野]에서 사냥하며 ⑧ 주몽이 ⑨ (다른 사람들보다) 활을 잘 쏘는 것이(= 것을 가지고) ⑩ 그(= 주몽에게) 주는 화살들이 ⑪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화살들보다) 적도록 하였는데, ⑫ 주몽은 ⑬ (화살들로) 얻은 들짐승들이 ● 매우 ⑭ 많았다. ⑮ 왕의 아들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 또한 꾀하기를 ⑯ 그를(= 동명을) 죽였으면, 하였다. ①王②以肥者●自③乘④瘦者⑤給朱蒙⑥後●⑦獵于野⑧以朱蒙⑨善射⑩與其矢⑪小⑫而朱蒙⑬殪獸●甚⑭多⑮王子及諸臣●又謀⑯殺之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동명이 마른 말을 얻어 혀를 찌르는 바늘을 뽑고서는 다시 말에게 풀, 물을 많이 먹였다[B-22-(3):⑨-⑫]고 적었습니다. 말을 준 것은 금와의 마지막 시험을 위한 것이었는데, 동명은 그것을 알지 못해 말을 다시 먹여 살찌도록 것입니다. 이어지는 시험 곧 사냥하던 이야기를 동명왕평 주석은 앞서 금와의 7명 아들들과 동명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로 여기고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뒤에 왕이 들에서 사냥하며 동명이 활을 잘 쏘는 것을 가지고 그에게 화살들을 적게 주도록 하였지만 동명은 그것으로도 아주 많은 짐승들을 잡았다[A-8-(11):⑥-⑭]고 적었습니다. 동명은 대소를 경계하게 한 일이 앞서 있었음에도 다시 이기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금와의 아들들, 신하들이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A-8-(10):⑮-⑯]고 적었는데, 논형 길험편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주석이 인용한 위략이 다시 인용한 어떤 기록은 금와가 동명이 자신의 국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동명을 죽이 하였다[L-(6):①-③ = M-(6):①-③ ]고 적었습니다. 금와는 때 뛰어남을 드러내던 동명의 말을 보고 앞서 동명이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되어 국을 빼앗을지도 모를 그를 마침내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L-(6) 논형 길험편: ① 왕은 ● 두려워하여 (동명이) ② 그(= 왕의) 국을 빼앗을까, 하여 ● 바라기를 ③ 그를(= 동명을) 죽였으면, 하였다. ①王●恐②奪其國也●欲③殺之
M-(6)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주석 인용 위략 인용 옛 기록: <① 왕은 ● 두려워하여 (동명이) ② 그(= 왕의) 국을 빼앗을까, 하여 ● 바라기를 ③ 그를(= 동명을) 죽였으면, 하였다.> <(魏略曰)(舊志又言)①王●恐②奪其國也●欲③殺之>




이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그러함을 몰래, 먼저 알아챈 유화가 동명에게 부여 사람들이 동명을 해치려 꾀하기에 그가 재주를 지닌 채 떠나도록 할 리가 없고 그러니 그들과 함께 머뭇거려 - 그들의 꾀함이 끝날 때까지 - 부끄러움을 당하기보다 멀리 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A-8-(12):①-⑩]고 적었습니다. 이어 유화가 가진 것을 동명을 위해 쓰도록 하였는데 동명이 그것들을 오이, 마리, 협부에게 주었고 그리하여 그들이 친구 - 동료 - 가 되었다[A-8-(12):⑪-⑭]고 적었습니다.


A-8-(1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 몰래 ② 그것(= 동명을 죽이고자 꾀하는 것)을 알고 ③ (주몽에게) 알려[告] ● 말하기를 "④ 국國 사람들이 ● 장차 ⑤ 너를 해치려는데 ⑥ 너의 재주[才], 꾀[略]가 ● 어찌 ⑦ 가도록(= 떠나도록) 하겠는가? ⑧ 그들과 더불어 머뭇거릴 수 없으니, ⑨ 머물러 부끄러움[辱]을 받아들이는 것은 ⑩ 멀리 가는 것과 같지 않다(= 못하다)."라고 하고 ⑪ (유화가) 가진 것들이 ⑫ 주몽을 위하도록 하니 ● (동명이) 이어 ⑬ (그것들을)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 등 3명[人]에게 주었고 ● (오이, 마리, 협부는) ⑭ (동명의) 친구[友]가(= 동료가) 되어 ⑮ 움직여 엄사-수[淹㴲-水]에 이르렀다. ①朱蒙母●陰②知之③告●曰④國人●將⑤害汝⑥以汝才略●何⑦往⑧不可與其遲⑨留而受辱⑩不若遠適⑪以有⑫爲朱蒙●乃⑬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⑭爲友⑮行至淹㴲水


곧 오이, 마리, 협부는 동명에게 유화가 준 돈을 받고서 - 용병처럼 - 목숨을 걸고 부여를 떠날 사람들을 구하여 얻은 동료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동명왕편 주석은 동명이 그리하다고 다짐을 맺었다[結] - 약속했다 - 고 적고 있는 슬기로운 동료들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 등 3명이었[B-23;①]간단히 니다.


B-23 동명왕편 주석: <● (주몽이 다짐을 맺은[結] 3명 슬기로운 동료들이) ①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 등 3명[人]이었다.> (暗結三賢友)<●①烏伊摩離陜父等三人>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살필 점들이 있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뒤에 죽고 비류,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던 일을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오간, 마려를 비롯한 10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움직였다[F-5:①-③[고 적었는데, 고구려가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신하들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보면, 오이와 똑같은 오烏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오간烏干은 오이의 아들, 오간과 같이 움직인 마려馬黎앞서 오이와 같이 움직인 마리의 아들에 해당합니다.


F-5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 온조가) 이윽고 ①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 신하들과 더불어 ② 남쪽으로 가서 ③ 움직였다. 遂①與烏干馬黎等十臣②南③行


그러니 마리摩離 가운데 마摩는 또한 마려의 마馬에 해당하는데, 오이烏伊 가운데 오烏가 새의 이름이라는 점을 통해 보면, 마리는 말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쓰던 무리 곧 마-가에 해당합니다. 협부陜父의 경우에는 짐승 이름이 바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마馬를 마摩로 적은 것을 통해 보면 소리가 같은 다른 글자를 적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찾아보면 과연 뜻, 소리가 모두 같은 협狹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으니, 곧 협보는 개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쓰던 무리 곧 구-가에 해당합니다.


곧 동명이 유화가 가졌던 것들을 주어서 - 용병을 부리듯 - 함께 부여를 떠날 수 있었던 3명은 새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쓰던 무리, 그리고 마-가와 구-가에 각각 해당하였습니다. 첫번째 무리는 앞서 금와와 뜻을 달리하여 등돌리고 한漢을 따라서는 부조-현이 두어지도록 한 남-옥저 무리고, 두번째 무리는 앞서 동명을 맡았던 무리로, 세번째 무리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낮은 위치에 있던 무리기에 쉽게 떠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8년 08월 기사가, 금와의 아들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에 보낸 사신의 말을 인용하여, 동명-왕이 우리[我] 신하들을 꾀었다[誘][A-13:①]고 적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이, 마리, 협부는 3개의 가들[加]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부여 사신이 그들을 동명이 꾀어낸 부여의 신하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A-1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8년 가을 08월) (사신이 말하기를 ")● (동명-왕이) ① 우리의 신하들을 꾀었다.("라고 하였다.) (琉璃明王二十八年秋八月)(曰)●①而誘我臣


그런데 동명과 함께 떠난 사람들의 이름들에 대해 달리 적은 자료가 있습니다. 위서 고구려열전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거의 같은 표현으로 잎서 일들을 적었는데, 동명과 함께 떠난 사람들의 이름과 수에 대해서는 달리, 동명이 오인烏引, 오위烏違 2명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갔다[V-1①-④]고 적습니다.


V-1 위서 고구려열전: ① 주몽(= 동명)이 ● 이어 ② 오인烏引, 오위烏違 등 2명[人]과 더불어 ③ 부여夫餘를 버리고 ④ 동남쪽으로 갔다. ①朱蒙●乃②與烏引烏違等二人③棄夫餘④東南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06년 20월 기사가 오이가 행인-국을 쳤다[A-14:③]고 적어 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였던 일들을 또한 전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보면, 오인은 오이가 잘못 전하여진 것이고 오위 또한 마리가 잘못 전하여지며 성이 오로 바뀌어 적힌 것입니다.


A-1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06년) 겨울 10월 ① 왕이 ② 오이烏伊, 부분노扶芬奴에게 명령하니.● (오이, 부분노가) ③ 태백-산[太白-山] 동남쪽 행인-국[荇人-國]을 쳤다[伐]. (東明聖王六年)冬十月①王②命烏伊扶芬奴●③伐太白山東南荇人國


위서 고구려열전은 또한 동명과 함께 부여를 떠난 사람들인 오이, 마리, 협부 3명 가운데에서 협부를 제외하고 2명이라고 적었습니다. 살펴보면, 그 이름이 그저 마른 사람[陜父]라고 다만 생김새를 적은 표현으로 여겨 적지 않고, 사람 수 또한 줄여 2명이라고 달리 적은 것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길어졌기에 일단 여기서 끊고 - 본래 오늘로 부여에 대한 3장 4편을 마무리하려 하였습니다만 - 내일 음 주제로, 흘승-골-성에 이르는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하여 그것을 매듭짓고 이번 편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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