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은 명절다운 명절을 보냈다. 무엇보다 도로에서 보낸 시간이 그랬다. 명절에 차가 막히는 게 한두 해 일은 아니지만, 올해는 뒤로 짧은 연휴 때문이었을까? 해남에서 인천까지 오는 데 11시간이 걸렸다. 거리도 거리지만, 도로에 차가 너무 많았다. 내비게이션이 빠른 길을 이리저리 찾아보려 용을 써도 별수가 없었다. 고향에 다녀오는 차들은 운전자만큼이나 지쳐 보였지만 얼굴은 번쩍번쩍 윤이 났다. 흰색과 검은색이 대부분이었고, 외제 차도 국산 차 못지않게 많았다.
요즘은 차가 흔하다. 명절이 아니어도 출퇴근길에 도로를 꽉 메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흔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귀한 재산이다. 그걸 내 돈으로 차를 사고 나서야 알았다.
첫 직장에서 1년 동안 번 돈으로 중고차를 샀었다. 새 차를 사는 게 경제적으로나, 서툰 운전 실력으로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차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던지 주차해있던 차가 살짝 긁히기라도 하면 발끈했다. 하지만 끝까지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에 찔리는 과거 때문이었다.
언니, 오빠가 학교에 가면, 엄마, 아빠가 논밭으로 일하러 가셨다. 나는 동네 친구 미란이와 바닷가에 가서 놀았다. 언니, 오빠 없이 바닷물에는 못 들어갔지만, 바위에서는 놀 수 있었다. 미란이와 나는 잠자리도 잡고, 개구리도 잡았다.
그날도 그랬다. 잠자리가 바위 위에 앉았다. 눈을 굴리던 잠자리는 안심한 듯 날개를 내렸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천천히 잠자리 가까이 다가갔다. 잠자리는 날개를 더 아래로 내렸다. 손을 멈추었다가 잽싸게 잠자리 날개를 잡았다. 성공이다. 언니가 알려준 대로 열심히 보고 연습한 덕분이었다. 미란이에게 자랑하려고 몸을 돌렸다. 미란이는 보이지 않았다. 잠자리를 꼭 잡고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미란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와 손을 잡아끌었다.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있던 잠자리 날개를 놓치고 말았다. 미란이는 짙은 회색 봉고차 앞에 멈추고 내 손을 놓았다.
봉고차 옆면에는 하얀 실선으로 달팽이 집처럼 처음과 끝이 열림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미란이는 바닥에서 납작하고 길쭉한 돌멩이를 집어 들어 달팽이 집 옆에 나비를 그렸다. 회색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이 신기했다. 나도 미란이를 따라 돌멩이를 집어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회색 봉고차의 옆면에 우리 둘의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연필처럼 흑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돌멩이가 어떻게 하얀색을 만들어 내는지 놀랍기만 했
다.
그때가 6살이었을 거다. 2시간에 한 대씩 지나다니는 버스가 동네의 유일한 자동차였던 깡촌에서 살던 때이다. 물론 크레파스도, 하얀 도화지도 귀해서 흙 바닥에 돌멩이로 낙서를 했었다. 그러니 자동차에 돌멩이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신세계였던 거다.
미란이와 나는 봉고차에 그려진 우리의 그림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때,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던지고 달렸다. 다행히 아저씨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다. 바닷가에서 가까운 미란이 집으로 들어가 숨었다. 낯선 아저씨들이어서 무서웠다. 차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면 지워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건 별로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차 주인한테 걸리지 않은 거에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 깡촌을 떠나 차 많은 도시로 이사하면서 그게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그런 일을 했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이 감춰두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모르고 했던, 알고 했든 간에 사람이 죄를 짓고 사는 건 그 어린 나이에도 힘들었나 보다. 가끔 그때의 일이 떠오르면 영락없이 죄지은 사람의 얼굴이 되어 화끈거렸다. 봉고차 아저씨가 우리를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귀경길 도로에 가득한 차를 쭉 이어 붙여 도화지를 만들어 손가락을 놀려 그림을 그렸다. 잠자리, 나비, 달팽이 집까지. 그리고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차들이 6살 그날로 데리고 갔다.
‘빵~’하는 경적에 손가락을 얼른 접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사진 © brambro,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