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은 내가 가장 먼저 듣는다
이 글은 뉴스레터 <함께하는 독학클럽> 7월 23일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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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되게 가식적이더라."
저의 지질한 20대를 기억하는 친구 S가 제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참여하고서 불쑥 이렇게 말했어요. 기분도 별로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종종 듣는 말이에요. 그 커뮤니티에서는 서로의 기록을 보며 다정한 응원을 주고받는데, S의 속마음을 짐작해 보자면 '누군가를 이렇게 세심하게 응원할 줄 아는 애가 나한테는 왜 그렇게 안 해줬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S에게 저는 여전히 상사 욕이나 늘어놓던 25살짜리였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가식적이라는 말과 함께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쩜 그렇게 솔직하게 글을 쓰세요?"입니다.
가식과 솔직 이라는 단어가 공존할 수 있다니, 무엇이 제 진짜 모습일까요?
내 모순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겠죠. 그래서 "글이 정말 솔직하다"는 칭찬을 듣거나 "이렇게 솔직한 글을 쓰는 비결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도통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 친구의 말처럼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이거든요.
조금 더 솔직해져 볼까요? 저는 솔직함이 언제나 미덕이라고 믿는 사람을 경계해요. 그 말 뒤에는 때로, 상대의 감정이나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솔직함을 가장해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에게도 100% 솔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함을 가장해 가혹하게 상처를 주는 불완전한 존재니까요.
솔직하게 나를 기록하라고 책까지 쓴 사람이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제가 생각하는 솔직함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일단 스스로 소화한 뒤에 내가 왜 그랬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했는지 깊이 고민하고 알아차리는 노력이 진짜 솔직함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하다는 건, 나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나를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내 말은 내가 가장 먼저 듣고 내 글은 내가 가장 먼저 읽습니다. 나는 나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있어요.
책 <내 일을 위한 기록>에도 이렇게 썼어요.
"SNS에 일기 루틴을 자주 소개하다 보니 일기에 대한 고민도 많이 듣게 된다. 나만 보는데도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되어 좋은 감정과 생각만 적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든다는 것이다. 일기는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에 끌려갈 필요는 없다."
스스로 불완전하고 별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계속 그 이야기만 반복해서 적을 필요가 있을까요? 일기는 내 삶에 대한 주도권과 편집권을 되찾는 선언적인 행위잖아요. 부정적인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무의식에 끌려갈 필요는 없죠. 나의 나쁜 모습을 파헤치기 위해 일기를 쓰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가 나를 기록하는 이유는, 내 안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알아차리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죠.
갈등 회피형 평화주의자로 30년 넘게 살면서 딱 한 번 친구와 소리를 지르며 대판 싸우고 절연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어요.
돌아보니 제 과실이 100%였더라고요. 당시 저는 1년 차 신입사원이었고 틈날 때마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회사 욕, 상사 욕, 동기 욕을 했어요. 그 애가 관심이 있는지 제대로 듣고 있는지는 상관없었죠. 저는 그냥 쏟아낼 곳이 필요했으니까요. 감정 쓰레기통 역할에 지친 그 친구는 몇 달을 참다가 결국 폭발했어요. "야! 이제 그만 좀 해."
그 말이 너무 서운해서 엉엉 울면서 말했어요. "너는 내 친구잖아! 친구끼리 하소연도 못 해? 친구가 뭐야! 솔직하게 삶을 공유하는 사이잖아!"
그렇게 서로 소울메이트라 부르던 친구와 절교를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때 저는 솔직함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있는 그대로 속살을 다 꺼내어 보여주는 게 우정이라고 착각했던 거죠.
하지만 세상에는 나쁜 솔직함도 있더라고요.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솔직함은 내 감정만을 우선하는 이기적인 행동이었어요.
요즘 취약성을 드러내라는 말 많이들 하잖아요. 이 메시지에 공감하지만, 먼저 '취약성'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취약'점'이 아니라 취약'성'인 이유가 있거든요.
우리는 누구나 상처받기 쉬운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서 이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자는 좋은 의도인데, 가끔 취약성을 취약점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취'약점'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취약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취약점을 지나치게 드러내서 상대를 지치게 하죠.
스레드에 어느 카페 사장님이 이런 글을 올렸더라고요."오늘 손님이 주문한 음료를 잘못 만들었어. 죄송해서 다시 만들어드리겠다고 했는데 출근 때문에 바쁘다고 됐다고 그냥 가시더라고.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
속상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더라고요. 하지만 이 글이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취약성이 아닌 취약점을 드러낸 글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취약성이 아닌 취약점을 드러낸다면 오히려 일에 대한 진심을 오해받을 수도 있죠.
취약성은 공감과 연대를 부르는 태도죠. 반면 책임과 신뢰 없이 드러내는 취약점은 말 그대로 '약점'이 될 수 있어요. 만약 이 글에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했던 노력, 그 노력의 결과까지 담겨있었다면 취약성을 드러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이 되었을 거예요.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요. 하지만 '날 위로해 줘'에서 끝나는 글은 취약점으로만 남죠.
사람들은 무섭도록 정확하게 알아차려요. 이 글이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함께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요.
앞으로도 저는 제 이야기가 꾹꾹 눌러 담긴 글을 쓸 거예요. 아주 솔직하게, 하지만 때로는 적당히 감추면서요.
솔직하게 다 드러내는 것 외에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랐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글을 쓰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선택권 없이 감정에 떠밀리는 것 같았죠.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요.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정말 나다운 태도는 솔직해야 할 때와 숨겨야 때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스스로 결정하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더라고요.
지금 내 자신에게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지금 이 글을 읽어줄 독자에게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내 앞에 있는 이 친구는 어디까지 듣고 싶은 걸까.
저는 오늘도 일기장에 거짓말을 씁니다.
친구에게 묘하게 기분 나쁜 말을 들었지만, 그래서 집에 와서 초콜릿을 왕창 먹고 기분이 더 안 좋아졌지만, 그런 이야기를 쓰진 않았어요.
'나 존중받고 싶었구나. 그 친구한테 인정받고 싶었구나.' 그 마음을 먼저 썼어요. 그리고 '초콜릿 맛있다. 그래도 나를 위해 내일은 먹지 말자'고 덧붙였죠.
친구 S가 이 글을 보면 또 가식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저에게 필요한 다정함을 알아차렸고 그걸 제게 줬으니까 오늘도 일기에 거짓말을 쓴 저를 슬쩍 칭찬해 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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