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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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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Jan 02. 2019

8년전, 내가 목격한 스카이 캐슬

그때 그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요즘 JT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매우 핫한 모양이다. 나는 평소 드라마나 TV 프로그램을 잘 챙겨보지 못하는 편이라, 스카이 캐슬도 시청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드라마의 인기가 워낙 높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 드라마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 큰 인물로 키우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부모들, 특히 엄마들의 욕망과 처절한 서사가 담긴 드라마라 그럴까 시청률이 연일 고공행진 중이다.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각각의 캐릭터나 서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겠다는 열망이 가득한 부모들과 그에 따른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고 하니 그 광경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간다.


 최근 방영되었던 회차에서는 하버드에 진학했다던 딸이 사실은 부모까지 속인 허위 입학이었고, 학교 측으로부터 사칭 등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당하는 스토리가 방영되었다고 했다.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2011년의 겨울, 내가 만났던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2011년의 겨울. 나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입학처에서 행정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수시와 수능 성적 발표는 물론이고, 정시 원서 접수와 최초합 발표까지 모두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바쁜 입시 캘린더의 일정 속에서 교직원 분들도, 조교들도 잠깐 숨을 돌려가던 겨울의 오전 시간.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앞에 앉아있던 내가 전화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ㅇㅇ대학교 입학처입니다." 응대 멘트와 동시에 상대측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XX. 그 학교는 어떻게 된 학교입니까?" 당황해서 잠시 멈췄다가,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천천히 말씀해 주시겠냐고 묻자 전화기 건너편의 남성이 계속 욕설을 섞어 말을 이어갔다. 들어보니, 자신은 이번에 수능을 본 학생의 학부모이고, 그 학생이 우리 학교에 정시 원서를 넣었다 했다. 딸이 수능에서 전부 1등급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는데 이번에 우리 학교 정시 지원 최초합에 떨어져 자신은 매우 화가 났단다. 매번 모의고사도 1등급만 맞던 딸이고, 이번 수능도 1등급을 맞았는데 어떻게 우리 애가 떨어질 수 있냐고.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애가 떨어진 걸 보면 학교에서 성적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부정한 행위를 했기 때문일 게 자명하니 이를 제대로 해명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교육청과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 했다.

 많은 입시 관련 전화를 받아봤지만, 그런 전화는 정말 처음이었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응대한 뒤에 전화를 홀드 해 놓고 과장님께 급히 이야기를 전달했다. 당황하고 겁먹은 나와는 달리, 과장님은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으로 걱정할 거 없으니 전화를 과장님 자리로 돌려달라고 하셨다. 전화를 돌려드렸다. 과장님은 그 학부모에게 정말 침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아버님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렇지만 성적은 저희가 따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한국 교육과정 평가원에서 일괄로 들어옵니다. 잘못되거나 조작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수능성적표를 가지고 자녀분과 함께 저희 입학처로 방문해 주시겠어요?"라고 이야기하셨고, 학부모는 그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조마조마 전화를 듣고 있다가 과장님이 수화기를 내려놓으시자마자 물었다. "괜찮을까요?" 과장님은 화통하게 웃으시며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분명 학생이 성적표를 위조했을 거라고 했다.

 얘기를 듣자마자 입에서 '헉'소리가 튀어나왔다. 욕설 섞인 전화를 들었을 때 보다도 더 당황스러웠다. 세상에나, 수능 성적표 위조라니... 미리 통화를 통해 받아놓은 수험번호와 성명 등을 통해 학생의 원서와 성적을 조회해 봤다. 실제 원서가 접수된 학생은 맞았지만, 수능 성적이 1등급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2,3 등급 정도였다면 이번 수능만 망쳐서 무서운 마음에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지만, 전과목이 거의 끝에 가까운.. 한참 낮은 등급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 아이가 입학처에 왔다. 아버지는 회사에 있어서 오지 못했고 학생만 왔다고 했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도대체 얼마나 까졌으면(!) 이런 엄청난 거짓말을 할 생각을 했을까'하고 혼자 생각했는데, 마주한 아이의 얼굴이 너무 맑았다. 아주 작은 체구에 떡볶이 코트를 입은 똑 단발의 여자애. 또래 아이들이 흔하게 하는 화장도 얼굴에 전혀 보이지 않는, 아주아주 말간 얼굴의 작은 아이였다. 물론 겉모습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이런 거짓말을 꾸며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을 한 아이였다. 겨울바람에 잔뜩 얼은 아이에게 차 한잔 줄까요, 물었고 아이는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면서 복사된 수능 성적표를 내밀었다. 정말 1등급이 가지런하게 놓인 수능 성적표였다.

 그런데 원점수와 표준편차가 조금 이상했다. 수능은 원점수와 표준점수가 나오는데, 원점수는 실제 시험에서 수험생이 받은 점수를 얘기하고 표준점수는 원점수의 상대적인 서열을 나타내는 점수다. 과목별 분포도 상에서 개인의 원점수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를 보여주는 건데, 언뜻 보기에도 그해 수능 성적의 원점수 표준점수 변환 값이 좀 맞지 않아 보였다. 그 아이가 정말로 수능 성적표를 위조했던 거였다. 과장님이 상담실로 들어가셔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십여 분도 채 되지 않아 아이는 입학처 문을 나섰다. 복사한 성적표를 다시 들고. 그리고 그 겨울, 다시 그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없었다.


 성적표를 위조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과장님은 종종 그런 경우들이 있다고 하셨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지만, 나에겐 두고두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전화 상으로 했던 얘기들 때문에 더 그랬다. 3년 내내 모의고사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던 아이. 학교 성적도 좋았다는 아이. 수능 성적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이는 분명 3년 내내 모의고사 성적표는 물론이고, 학교 성적표까지 위조했던 게 분명했다. 그 아이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은 내내 거짓말로 채워진 위태로운 삶이었을 것이다. 부모에게 성적을 거짓으로 알리며 학교생활을 했던 아이가 뭘 얼마나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입학처에 전화를 걸어 욕설 섞인 분노를 뱉어냈던 아버지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할 때, 그 사람은 결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을게다. 아이는 어쩌면 정신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심각한 폭력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아이를 거짓말과 성적표 위조로 내몰았겠지.

 내 자녀는 나보다 더 나았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 그리고 아이에게 '좋은 대학'만이 선택지는 아닌데 많은 부모들이 그것만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사라지지 않는 학벌 만능주의 속에 아이들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ㅇㅇ대학의 입학생'이 되는 삶을 산다. 자라는 도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한 가지 길만을 옳다고 얘기하고, 그 길 밖으로 나가려 하면 '부모'의 권위로 억눌러 그 길로 도로 질질 끌고 들어간다. 인생의 가치나 목적 같은 것을 오직 성공에만 둬야 하는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하기를 주입받고, 평가와 점수로 줄 세우기가 점철된 10대를 보내는 아이들이 너무 안타깝다.

 수능은 분명 교육상 필요한 제도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전부가 아님을, 인생에는 더 값어치 있는 일들이 많음을, 우리는 탑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부모가 아이에게 꼭 알려줘야 한다. 수능이라는 관문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그 과정이 값어치 있는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쁠 수도 있다. 허나 그 노력의 경험이 앞으로의 삶에서 만날 언덕마다 힘을 내 언덕을 넘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수능에 실패했기 때문에 실패하는 인생이란 없다.

 그 작은 아이가 유난히 생각나는 겨울이다. 이제는 이십 대 후반이 되었을 그 작은 아이가 부모가 만들어 낸 거짓말쟁이 실패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자로 자랐기를. 어떤 모습으로 살건 타인을 속여야만 하는 위태로운 매일 보다는 행복하지 않을까.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나 항상 행복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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