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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body Jan 27. 2021

캘리포니아 와인 여행 3

롬포크, 와인쟁이들이 모이는 작은 동네

2박 3일에 불과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저녁에도 걸어 나가서 시음을 하거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숙소를 찾아서 예약했다. 롬포크 Lompoc가 그런 특별한 동네 같았다.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그러니까 부르고뉴 품종으로 유명한 산지 산타 리타 힐스 Sta. Rita Hills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주거 지역이었으며 아는 사람만 아는 소규모 부티크 와이너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시골 동네 치고 싸지 않았던 호텔은 좀 오래된  (아마도 모텔이었을) 긴 목조 건물을 레노베이션해서 호텔 체인 이름을 달아놓았다. 특별히 예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로비를 통하지 않고 들락거릴 수 있는 출입구가 있어서 혹시나 사람과 마주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만취했거나 너무 자주 왔다 갔다 하거나 뭔가 불법적인 일을 한다면 편리할 것 같았다. 묵는 동안 어느 한 가지도 못해보았지만 약간의 프라이버시가 싫지는 않았다.


짐을 던져놓은 다음 야심 차게 만들어온 와이너리 목록에서 영업 중인 곳 몇 군데를 구글맵에 찍어서 걸어 나갔다. 동양인이 거의 안 보이는 작은 동네에서 차를 두고 걸어 다니니 더욱 눈에 띄어 오지에 온 기분이었다. 캘리포니아 현지인인 언니마저도 전혀 모르는 행성을 탐험하는 스산한 불편함이 느껴지는지 긴장해서 걸었다. 미국에선 만능인 줄 알았던 구글맵은 우리를 공장 혹은 물류창고처럼 생긴 쇼핑몰로 안내했다. 역시 인적이 별로 없었고 못생긴 콘크리트 건물들 중 가게 출입문처럼 생긴 문들도 거의 닫혀 있었다. 이쪽저쪽 둘러보며 헤매다가 원래 가고 싶었던 와이너리 피들헤드 셀러즈 Fiddleheads Cellars와 플라잉 고트 셀러즈 Flying Goats Cellars의 간판을 찾았으나 영업 중이라는 구글 안내와는 달리 문이 잠겨 있었다.


얌전히 직장 다니고 살림하며 평생 모범생으로 살아온 언니를 이상한 (그리고 조금 위험해 보이는) 동네로 끌고 와 헛수고나 하게 만든 죄를 생각하니 미안해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가 나를 잡아끌었다. 문이 열린 카페 같은 데가 보여 들어가 보니 오호라! 와인 시음장이었다.


목록에서 시간 되면 가고 아님 말고로 표시된 와이너리 중 하나인 몬테마르 Montemar Wines 였다. 포도밭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인근 산타 리타 힐스에서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를 사서 부르고뉴 스타일로 와인을 만드는 부티크 와이너리였다. 롬포크 와인 게토 Lompoc Wine Ghetto라는 허름한 복합단지에는 와인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포도밭을 사거나 양조장을 운영할 재력이 없는 신진 와인메이커들이 양조 시설을 공유/대여해서 개성 있는 와인을 소량 생산하고 있었고, 몬테마르도 그런 와이너리였다.


나는 피노 누아만 6 가지 시음하는 Pinot Flight를 선택했고 언니는 여러 품종을 맛보는 시음을 했다. 양조도 직접 한다는 젊은 직원과 여자 친구는 열정적이면서 친절했고, 그날 만들고 있었던 샤르도네를 맛보게도 해주었다. 필터링과 청징 등 와인에서 잡맛을 없애고 안정화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 발효가 끝난 포도즙은 꼬릿하고 시큼털털해서 한 모금인데도 맛있는 척을 하기 어려운 요상한 맛이었다.


양조 중인 샤르도네, 그리고 와인메이커들


천천히 시음을 하면서 붙임성 좋은 젊은 와인메이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제가 양조에서 사는 동네, 가족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젊은이는 언니와 한 동네, 그것도 언니네 집에서 보이는 아랫집 아들이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취미로 시작한 일을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돕다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여자 친구와 함께 사랑의 도피처로 와서 행복한 양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둘은 언니 딸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언니는 어쩐지 이름이 익숙하다 했더니 이웃을 롬포크에서 만났다면서 몹시 반가워했다. 몬테마르라길래 고지대와 바다 근처 밭에서 난 포도로 만들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이웃인 몬테마르 씨네 와인이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들의 취미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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