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메모
언제부터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변함없이 나의 대답은 아니요. 이 대답은 아마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너와 나의 로터리. 그래, 거기. 너도 기억하지. 처음은 마트 이름을 따서 불렀지만 몇 년 사이 여덟 번이 넘게 이름이 바뀌어서 언젠가부터는 그냥 '로터리 숲'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작은 원을 비밀 기지처럼 사용하면서 슬퍼해야 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조그마한 원 안에 꼭 숨어들었다. 마주 앉은 우리는 삑삑, 쌕쌕, 훅훅, 끽끽 대는 차들의 소리를 가만히 듣곤 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눈물 같은 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떤 순간엔 슬픔을 가려주는 커튼처럼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그런 것쯤 아무 일도 아니야. 끅끅. 우릴 위해 더 크게 울어주는 것처럼.
그럴싸한 이름들로 큰 간판을 내걸던 싱싱, 알뜰, 오렌지, 현대, 제일. 그 많은 이름들이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 이별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그러면 다음 자리에 감쪽같이 새로운 이름이 내걸렸고, 그때마다 우리의 비밀 기지도 자꾸 변했다. 로터리 숲이란 이름을 갖기 전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이름들이 지나갔다. 그때 내가 마음먹은 일 중 하나였다.
변할 것들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슬픔은 묻어두고 도망치기.
동네에 생긴 자그마한 마트는 24시 열려있다. 꽤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곳이다. 밤낮이 거꾸로 변하더라도 항상 편하게 들러 물건을 살 수가 있다. 새벽 3시에도 장바구니 하나 챙겨 들고 산책 삼아 마트를 찾곤 한다. 그때마다 점원이 묻는 “적립하시나요?” 질문에 나는 아직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어차피 또 없어지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남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거기서 만나자는 말은 울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신호니까 거기로 오라는 네 말에 마트를 지나는 길부터 곧장 슬퍼졌다. 그토록 싱그럽고 씩씩한 이름들도 하나같이 슬픔이 묻은 것처럼 느껴졌었다.
네 탓 아니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금세 초라해진 마음 때문에 포기했던 나라니까.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순간을 치사하다고 표현할 어린이가 또 어디 있겠어. 어릴 적부터 마음에 뭔가 남기는 게 끔찍이도 싫었나 봐. 어제는 익숙한 내 얼굴을 가만히 보며 자주 오는 아가씨라고 눈인사를 건네는 점원을 봤지만 그럼에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라고 말했어. 그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