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꺼이 '폭싹 속았수다'

아이유가 연기한 시간, 학생들이 AI와 함께한 시간

by 김형수

2025년 3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남긴 여운이 여전히 제 강의실에 머물고 있습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이지만, 표준어의 뉘앙스 그대로 우리는 이 드라마에 ‘완전히 속았습니다’.


우리는 딥페이크나 특수 분장 없이 오직 연기력만으로 세대를 건너뛴 아이유의 얼굴에 속았고, 그 스크린 픽셀 너머에 있는 애순과 금명의 삶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은 AI 도구 사용 이전 세대가 보여줄 수 있는 배우의 창의력이 빛나는 영상입니다. 첨단 기술의 개입 없이, 오직 인간의 몸과 감정의 깊이만으로 빚어낸 ‘진짜 같은 허구’에 우리는 기꺼이 속아주며 감동합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 AI 도구 사용 세대인 제 강의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학기 ‘AI 콘텐츠 리터러시’ 수업의 기말 과제는 ‘주제 프로젝트: 비주얼 에세이’입니다. 학생들은 챗GPT와 미드저니 같은 생성형 AI를 도구로 활용해 ‘AI와 나의 이야기’를 시각화해야 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AI에게도 ‘폭싹 속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속는다’는 것은 AI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환영(hallucination)에 눈이 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유의 연기에 우리가 몰입했듯이, 학생들이 AI라는 도구와 함께 만들어 낸 세계관과 이야기에 내 마음이 얼마나 움직이고, 그 세계 속으로 얼마나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AI 시대의 창의성은 조금 다른 방식의 ‘수고로움’을 요구합니다. 과제 수행 지침을 확인한 학생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AI와 함께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드는 과제인데, 평가 내용에는 ‘프롬프트 기록’, ‘실패한 대화 로그’, 그리고 ‘본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담긴 영상 발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AI가 다 알아서 만들어주는데 왜 굳이 과정을 기록하고 제 얼굴을 보여줘야 하나요?”


학생들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드라마 속 아이유가 우리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얼굴 분장이나 영상 편집 기술이 정교해서가 아니다. 그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 뒤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희가 AI로 만드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미드저니가 순식간 쏟아낸 매끈한 이미지만으로는 누구도 속일 수 없다. 그 이미지를 얻기 위해 너희가 AI와 씨름하며 고민했던 과정, 여러 번 고쳐 쓴 프롬프트의 흔적, 즉 ‘보이지 않는 서브텍스트’가 담길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콘텐츠가 된다.”


이번 학기 최종 프로젝트는 단순히 학점을 따기 위한 노동이나 AI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결과물을 제출하는 일이 아닙니다. ‘프로젝트 수행 과정을 기록할 문서’에는 학생들이 흘린 땀방울의 흔적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AI의 말만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나만의 관점과 맥락’을 담기 위해 수없이 실패하며 쌓아온 기록들입니다. 이것은 AI 시대에 우리가 겪어야 할 새로운 의미의 “폭싹 속았수다(수고하셨습니다)”일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속고 싶습니다. 한 번은 아이유 같은 인간 배우가 온몸으로 빚어낸 아날로그적 진정성에 압도되어 속고 싶고, 또 한 번은 우리 학생들이 AI라는 차가운 도구를 뜨거운 열정으로 달궈 만들어낸 새로운 이야기에 황홀하게 속고 싶습니다.


학기말 발표 날, 스크린에 띄워진 AI와 대화하며 만든 과제물을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하는 학생들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AI와 함께한 치열한 시간 속에 담긴 학생들의 진심이 저를 완벽하게 속여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는 날, 그들의 창작 과정에 경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멋진 ‘구라’를 만드느라, 다들 정말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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