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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Oct 23. 2017

핑크와 똥냄새, 늘어난 팬티

06 - '무엇'

1. ‘똥값’에서는 똥냄새가


지금은 시골에서 텃밭 일구고 자급자족하는 삶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며 살고 있지만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도시를 동경했었다.


제주도 남원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농번기에는 농부인 부모님을 도와 과수원에서 귤을 따고, 여름에는 할머니를 따라 온종일 검질을 맸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간식으로 우영팥에서 물외를 따다 된장 찍어 아그작 씹어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부모님이 어둠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 집안에선 농약 냄새가 났다.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하루종일 농사를 지어도 부자는 되지 못했다. 부자가 되는 것을 바란 적은 없지만, 멍이 들고 농약 냄새 밴 땀은 흘리기 싫었다.


그런 나에게 흙 위에 매끄럽게 발린 시멘트는 매력적이었다. 시멘트 위에선 목이 늘어난 후줄근한 작업복 대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와 깨끗한 정장을 입고 살 것이고, 그러면 나도 구두처럼 빛나고 정장처럼 깨끗한 삶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대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22살 때 뉴욕 맨해튼에 갔다. 하우스셰어 사이트를 뒤져 맨해튼의 ‘핑크빌딩’을 알게 됐다. ‘핑크’는 화려한 도시의 이미지를 강화시켜주는 색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핑크’ 빌딩은 맨해튼에서 가장 후줄근하게 있으면서 대도시를 떠날 수 없는 가난뱅이들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집은 아주 작은 원룸 형태였는데 화장실과 욕실은 한 층에 하나씩 있었다.


아침에 볼일을 보려고 화장실에 가면 변기는 항상 막혀 있었다. 나는 배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핑크빌딩 근처에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에 매일 갔다. 지적욕구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난을 더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해 귤값은 똥값이었고 부모님은 매달 보내주던 어학연수 경비를 내가 뉴욕에 있을 때 보내지 못했다.


터무니없이 싼 값을 표현할 때 ‘똥값’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 단어에선 정말 신기하게 똥냄새가 났다. 단어에선 핑크빌딩의 막힌 변기 냄새가 넘쳐흘렀다. 그런 와중에도 배는 고팠다. 돈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나처럼 가난했던 하우스 메이트 B는 뉴욕에서 가난뱅이가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줬다. B는 길거리나 클럽에서 말 붙여오는 낯선 남자들과 친구가 돼서 밥을 얻어먹었다. 자기 몫으로 2~3인분을 시키고는 남은 음식을 싸서 집에 갖고 와 여러 차례 나눠 먹었다. B가 싸 온 음식을 같이 먹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고 깨끗한 삶과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그 도시를 떠났다.


힘들었던 뉴욕 생활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도시를 동경했다. 흙 위에선 평생 고생의 냄새가 굴레처럼 쫓아다니고 몸에서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시멘트 위에선 잠깐 똥냄새를 맡을지라도 금세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다음 해에 서울에 갔다. 비슷하게 가난한 친구 L과 같이 살았다. 중학생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던 L은 가난을 숨기는 데에 능숙했다. 도시는 가난을 동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무시를 당하면 생존할 수 없다고 했다.


몇 푼 안되는 시급을 주면서 가게 사장들은 강도 높은 노동을 시켰고 이마저도 높은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을 버텨내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학비는 학자금 대출로 이어졌고 돈은 써본 적도 없는데 희한하게 빚은 늘었다. L은 서울에서 치열하게 살면 이 모든 것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가난을 최대한 숨기며 로또 번호를 적어 내려가 듯 서울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날 밤, 잠옷으로 갈아입는 내 모습을 보고 L이 비웃었다. 그런 늘어난 팬티는 서울 할머니들도 입지 않는다 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 어둠이 없는 밝은 서울이 처음으로 미웠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L은 서울에서 성공해서 가난으로 고생하는 엄마를 편하게 해주겠다는 포부로 담담한 이야기를 마쳤다.


동이 트면 L은 서울에서 가난해 보이지 않기 위해 무장했다.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명품 가방을 들었다. 스타벅스 텀블러를 들고 예쁜 속옷을 입었다. 그런 무장엔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L의 남자친구 조건엔 돈이 많아 용돈을 줄 수 있냐는 조건이 붙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가난을 숨기려는 행위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온갖 빛과 화려한 성공담과 출세희망으로 반짝이는 이 도시에서 나는 늘어난 내 팬티처럼 마음이 축 늘어나 버렸다. 가난을 숨길 재간이 없는 나는, 가난을 껴안지 않는 곳에서는 부적응자였다.


예쁜 팬티처럼 가지런하고 탄력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 서울을 떠났다.



2. 가난한 것들끼리 가라앉지 않기 위해


언제부터 시골에서의 삶을 바랐던 건지 모르겠다. 대도시를 동경했던 시기와 이미지는 크게 박혔는데 시골을 동경한 시기와 이미지는 모호하다. 어쨌거나 지금 나는 제주도 시골 마을에 살고 있고 우영팥엔 텔레비전을 보며 먹었던 물외를 심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 온 부적응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일해야 하는 친구, 돈 한 푼 없이 건강한 신체와 자연을 믿고 농사를 지었지만, 쫄딱 망한 친구, 자꾸 오르는 전세금 때문에 이사 다니는 게 지겨워 다음 생애엔 아무 데나 집 지을 수 있게 거미로 태어났으면 하는 친구. 우리는 서로 얼마나 돈이 없는지 이야기하며 놀았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무료로 우정을 확인했다.


가난한 것들끼리 종종 집회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병원비가 없어서 아파도 병원 가기를 꺼리는 부모를 생각하며, 일 년 내내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면 제대로 된 비용을 받기를 바라며,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그렇게 가난한 것들끼리 서러움 없는 세상을 바라며 촛불을 들었다. 종종 높은 일당을 주는 하루 알바날과 집회 날이 겹칠 때면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또 서러웠다. 가난의 무게로 일상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익사하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뻐끔거리고 있다. 막막한 바다 위에서 뻐끔거리는 것들과 함께 서러움 없는 섬으로 가고 싶다.


글쓴이: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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