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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Apr 22. 2018

4,월은 어떻게 모두의 기억이 되었나

[10_수필]

 구미에서 열린 세월호 연작 다큐멘터리 상영회에 참석해 <어른이 되어>라는 작품을 보았다. 세월호 사건 이후 생존자의 삶을 그와 동갑내기인 감독이 곁에서 찍은 다큐멘터리였다.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생존자들과,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 곁에서 아픔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감독은 생존자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세월호 사건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그건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고, 그게 참 아이러니하다고. 동의가 되는 말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운명처럼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운명은 홀로 오지 않는다. 운명은 운명을 거스르려는 사람들과 함께 온다. 나는 이 아이러니에서부터 저항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상영회 이틀 전 사드기지 공사 장비 반입 시도가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고 성주 소성리에 왔다. 이틀간 세 사람과 함께 움직였다.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소성리에 왔고, 한 사람은 원래 소성리에 머물고 있었다. 함께 내려온 사람 중 한 명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오래 했고, 강정마을에 갈 때마다 고향에 온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다른 한 명은 세월호 활동을 오래 해왔다. 제주도에 살지만, 명절과 4월에는 매번 광화문에 찾아온다. 소성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도 강정마을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이다. 그는 일 년 넘게 소성리 상황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운명은 고통을 동반한다. 돌이킬 수 없음은 거대하면서도 구체적이다. 운명을 겪은 사람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절망한다. 운명이 더욱 무서운 점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고통의 당사자는 어째서 운명이 자신에게 왔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린다. 위에서 말한 세 사람은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당사자 곁에 오래 머물면서 함께 싸우고 있다. 당사자의 고통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고통을 섣불리 짐작하려 하지 않는다. 운명은 그들을 비껴갔지만, 그들은 그것이 결코 자신에게 책임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들이 운명을 인정하는 유일한 방식은 오히려 운명이 모두의 운명일 때이다.     


 고통은 평등하지 않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오래 살아온 마을이 사라질 때, 그 상실감과 돌이킬 수 없음을 모두가 같은 정도로 느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운명을 목격한 누군가는 운명을 거스르기로 결심한다. 운명을 목격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사람이 배가 가라앉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 순간 누군가는 운명이 묻지 않았던 책임의 소재를 밝혀내려고 결심했다. 그것은 고통의 책임을 나눠서 지려는 일이다. 그렇게 운명은 모두의 운명이 될 수 있다. 운명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면, 운명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글쓴이 - 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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