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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Apr 22. 2018

4, 월의 영화 리뷰-바람 바람 바람

[12_리뷰]

 다음 글은 '바람 바람 바람'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바라겠습니다.


 영화 리뷰에 대한 청탁이 있기 얼마 전부터 데드라인이 코앞인 지금까지, 필자가 극장에서 관람한 영화들은 대개 준수하거나 탁월한 작품이었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시대가(특히 미국이) 필요로 하는 보편적 가치와 시네마라는 종합예술의 치유력이 아름답게 합치된 걸작이었고, 르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영화라는 매체가 사랑(혹은 우리가 종종 '사랑'이라고 착각하곤 하는 모종의 감정)과 성장의 속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 훌륭한 영화였다. 심지어는 정범식이 연출한 '곤지암' 또한 근현대사의 한과 호러영화의 관습의 접점 속에서 기묘한 순간을 포착하는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도마 위에 다른 영화를 올려놓고자 한다. 요리할 맛이 나는 근사한 재료는 아니지만, 할 말이 없지는 않기에. 이제 이병헌 감독의 신작 '바람 바람 바람'에 관해 곱씹어보자.



 '봉수'(신하균)는 아내 미영(송지효)만을 바라보는 남편이지만 둘의 관계는 사실상 권태기에 접어들었고, 계획했던 임신 또한 시원치 않아 걱정이다. 그 순간 오랜 세월 수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피운 처형 석근(이성민)의 인도에 따라 봉수는 바람의 세계에 진입하고, 미영의 눈을 피해 제니(이엘) 과의 밀회를 즐긴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깊어지고 이중생활의 벽이 허물어짐에 따라 봉수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커져만 가고, 네 명의 관계는 거대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본작을 보러 온 관객들이 두 편의 영화를 연상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우선, 우디 앨런의 작품에 관하여. '바람 바람 바람'은 경쾌한 템포의 재즈로 막을 올린다(우디 앨런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때 재즈는 그의 추한 개인사만큼이나 핵심적인 코드이다). 쾌락과 낭만에 목마른 이들은 결국 본인이 걷던 노선을 벗어나기 시작하고, 종잡을 수 없는 파국을 향해 휩쓸려 내려간다. 물론 그 탈선이란 불륜을 의미하며, 파국을 향한 일련의 사건들은 아이러니로 가득 찬 헛소동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우디 앨런의 작품관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이에 더해 '롤러코스터'라는 극 중의 테마는 공교롭게도 우디 앨런의 최근작인 '원더 휠'에서 관람차를 활용하는 방식과 겹쳐 보인다. 하지만 이병헌은 우디 앨런이 되지 못한 채 시종 미끄러지기만 한다. 그의 시선에는 깊이와 철학이 없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논하며 삶의 실존적 딜레마를 은밀하게 끄집어내는 앨런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는 더욱 깊은 영역에 들어서지 못한 채 에피소드의 잔재미 그 자체에서 만족할 뿐이다. 굳이 앨런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그가 직조한 내러티브는 다소 맥이 빠진다. 서사의 흐름이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자주 산만해지며, 다루어져야 할 인물들의 전사는 최대한 생략된 채 주인공 봉수의 불륜을 정당화할 수단으로 불공평하게 활용된다. 그 모든 요지경을 종결지으려는 듯 들이닥치는 요란한 클라이맥스는 불균질할 정도로 온화한 방향으로 정리되어 의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귀결은 작품의 주제의식 또한 훼손시켜 소재를 대하는 감독의 진실된 태도마저 의심케 한다.



 이어서, 감독의 전작 '스물'에 관하여. '바람 바람 바람'에서 이병헌은 본인의 전작이 보여준 단점을 그대로 답습한다.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의 조형법. '스물'에서의 민효린이 그렇듯, 극 중 봉수를 매혹하는 '제니'라는 캐릭터는 사실상 남성적 섹스 판타지의 노골적인 형상화와 다를 바 없다. 당구장에서 벌어지는 물과 관련된 대목이나 봉수와 제니의 카섹스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주변의 남성들은 끊임없이 제니(와 봉수) 주위를 기웃거리며 음흉하게 바라본다. 이는 제니를 다루는 감독의 태도를 직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니의 능동적인 태도와 봉수와의 관계를 리드하려는 여러 번의 도발은 사실상 그녀를 향한 대상화를 정당화하려는 이병헌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 이뿐인가. 극 중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만큼의 구체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스토리의 부품으로 허망하게 '사용'된다. 미영의 불륜은 사실상 봉수의 불륜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써만 활용되고, 장영남이 분한 담덕은 석근의 변화를 위한 플롯의 전환점으로 소비되는데 그친다(석근의 바람기를 반성케 하기 위해 담덕은 극에서 죽음을 맞음으로써 퇴장해야 했다. 플롯을 위한 편의적인 '여성' 소비) 이토록 불편한 요소를 위트있는 연출력과 대사로 포장해 재미있고 그럴 듯하게 느껴지지만, 얄팍한 젠더 감수성을 무마하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남성적인 시선이 재미와 유머의 전제는 아니지 않나.



 눈여겨볼 지점이 전무한 졸작인가, 에 대한 짧은 대답. 아니오, 에 가깝다. 본작에 일말의 정을 붙일 수 있다면 그중 8할은 배우들의 몫이다. 이성민은 코미디 연기와 정극 연기 양쪽에서 두루 기량을 뽐내며 상당한 재미를 안기고, 신하균의 몇몇 순간은 흡사 코미디 영화에서의 오버액팅의 정석적인 용례처럼 다가온다(특정 대목에서의 그는 전성기 시절의 짐 캐리를 연상시킨다). 이엘은 스크린에 등장할 때마다 서스펜스의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송지효 역시 안정적인 연기로 나름의 존재감을 꾸준히 관철한다. 각본가와 연출가를 겸한 이병헌의 터치 역시 경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찰기가 잘 살아있는 대사 감각과 씬과 씬 사이에 리듬을 불어넣는 그의 손길은 깊이와 위엄은 없을지언정 신선하고 즐겁다. 다시 말해, 그에게 홍상수와 우디 앨런을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겠지만, '과속 스캔들'을 막 내놓은 강형철을 연상케 하는 센스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열거한 일부 장점들이 작품 전반에 드러난 허다한 단점을 무마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 역시 아니오, 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몇 마디의 사족. 지난 몇 년간 주류 한국영화계는 위험한 타자화와 남성 중심적인 편견, 그리고 이에 대한 관성적인 자기변명으로 넘쳐났다. 조선족을 야만적인 악인들로 대상화하고 여성들을 구원을 갈구하는 약자로 전락시키며, 기득권층 중년 남성적인 시선으로 '청춘'의 정의와 가치를 규정하고 착취하는 영화가 개봉했고('청년 경찰'), 여성 캐릭터에게 이름조차 부여하지 않은 채 악당들에게 혹독한 폭력을 당하는 고깃덩이 혹은 남성들의 계급적 상승 및 유지의 수단으로 소비하는 영화가 있었으며('VIP'), 남성적인 힘의 과시에 도취되어 이를 멋과 정의로 변명하고 포장하려는 영화들이 가득했다(앞선 두 편을 위시한 수많은 한국 상업영화들). 심지어 이러한 영화들은 대부분의 경우 관객들의 높은 호응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했다. 혐오와 폭력이 영화적 트렌드가 된 지금, 투자자들과 창작자들이 비슷한 스탠스의 작품을 열심히 기획하고 제작하리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예측이 아니다. 참담한 현실과 전망이다.



 그렇다면 변화의 가능성에 관하여. 흥행과는 별개로, 개별 작품의 인권 및 젠더 감수성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며 공론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는 한국 상업영화의 흐름에 있어서 작지만, 기분 좋은 변수를 이끌어내고 있다. 'VIP'의 경우 앞서 제시한 혐의로 인해 참담한 흥행 실패를 경험했으며, (비록 여성 대상화와 물리적 힘에 대한 경도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범죄도시'는 조선족의 타자화를 최대한 지양하려는 태도를 강조했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악마를 보았다'의 완성도에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극 중 최민식과 김인서의 섹스신을 두고 순순히 수긍하지 않는다. 어제의 생각은 오늘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흥행을 보장하는 공산품에 매달리느라 공정한 두 눈을 스스로 닫아버린 창작자들에게,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주류문화에 내재된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 상업영화 종사자들에게 고한다. 마음을 열고, 치열하게 변화하라. 돈으로 두 눈을 가린 자들은 제대로 볼 수 없겠지만, 관객들은 분노하고 있다. 당신들의 탐욕보다 더 뜨겁게, 진실되게.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글쓴이 - 고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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