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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Jul 22. 2018

바람

[2_수필]

세월호는 내 마음속 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러서 잊어질 때도 되었지만 그러지 않는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에 살게 되었다면 우리를 대신해 죽은 사람들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기린다. 모두의 마음속에 그런 존재, 조용히 기억하고 기리는 이가 있을 것이라는 말처럼 누군가에게는 그게 전태일이겠고, 누군가에게는 그게 이한열일 것이다. 나에게는 그게 세월호의 승객들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우리 대신 세월호에서 울부짖으며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희망이 가득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 참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172명은 끔찍한 기억과 여전히 싸우고 있다.  

진실을 밝혀달라는 상식적인 요구에 방해와 탄압으로 일관해 온 국가, 그럼에도 여전히 책임자는 처벌받지 않았고 진상규명은 되지 않았다. 

다큐 영화 <그날 바다>를 보고 많이 울었다. 부끄러울 수도 있었지만, 영화관이라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울었을까? 왜 세월호 참사를 잊지 못할까? 첫째, 그런 일이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사회가 세월호처럼 침몰 할 수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둘째,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지켜주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때문이다. 셋째, 무능한 우리의 국가와 사회 때문이다.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와 사회가 세월호 참사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국민의 마음에 ‘안전’을 새겼다. 우리 엄마는 항상 리본을 달고 다닌다. 벌써 4년이 넘었지만 땔 생각이 없다. 간혹 지인들로부터 아직도 붙이고 다니냐는 험담을 듣기도 하지만 엄마는 “나도 엄마라서 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을 보면 세월호가 자식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안전이라는 낙인을 찍어준 것 같이 느껴진다.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는 안전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일어나면 안 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좋은 인연과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일상이 되었다. 서울이면 발걸음이 광화문 광장을 향한다. 막상 가면 뭐하러 왔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항상 서울에 오게 되면 반복한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광화문 광장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서명 운동, 설문 조사, 지나가는 시민들의 칭찬과 악담 등을 통해서 얻은 자신감과 용기 덕에 소녀상이나 노동 문제 등에 먼저 다가갈 수 있었다. 이처럼 세월호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비상식적인 일에 대해서 분노하고 행동에 나설 수 있게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다시는 제주 4.3과 같은, 5.18 민주화 항쟁과 같은, 민청학련 사건과 같은, 세월호 사건과 같은, 성 노예제 같은, 난민 문제 같은 안타까운 일이 발생 하지 않도록 나라가 상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4월 16일 비가 내렸고 바람이 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벚꽃들이 비와 바람에 의해 떨어지는 모습이 희생자들이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하루빨리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말한다. 세월호 이제 되었지 않겠냐고, 정권도 바뀌었으니 이제 잘 해결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우리가 아픔을 공감할 수는 있어도 아픔을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당사자들이 이제는 충분하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지 않는 한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나는 방 한쪽에 세월호 추억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도 각자 기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억하면 좋겠다.  


글쓴이 - 장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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