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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Jul 22. 2018

연상호의 변화는 그의 반성과 바람인가

[5_리뷰]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부산행' 이후 연상호의 행보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땐, 그가 예술가로서 이만큼의 슬럼프를 겪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옥' 연작과 '창'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계의 유망주로서 이름을 알린 그는 장편 데뷔작 '돼지의 왕'을 선보이며 관객들로 하여금 한국형 성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케 했으며, 이어서 발표한 걸작 '사이비' 를 통해 지금 국내 영화시장에서 가장 논쟁적인 목소리를 내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관객과 평단이 그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설령 그의 미학적 방식에 의구심을 품었던 평자들이 있더라도 특유의 과격한 에너지와 강렬한 주제의식의 힘에 관해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2016년 개봉한 그의 첫 실사영화인 '부산행'은 당시 한국영화계의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었다. 가장 영화적인 소재를 쥐고도 언제나 그림의 영역에 고집스레 매달렸던 작가가, 드디어 '진짜' 배우들을 데리고 ‘작화’가 아닌 ‘촬영’ 작업을 진행한다니. 더군다나 차기작이 한국 상업영화에선 전례가 없었던 '좀비물'이라니. 돌이켜보면 그의 스타일은 장르 고유의 음울한 속성을 살리기에 적격이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궁금증과 기대감이 뒤섞인 지대한 관심을 쏟아냈고, 그 후 들려온 칸 영화제에서의 호평은 대중의 하이프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증폭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2016년 영화계에 있어 가장 거대한 성과를 달성했다. (비록 CGV의 부도덕한 입김이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관객수는 1000만을 훌쩍 넘기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해외 관객들의 눈마저 사로잡으며 바이어들로부터 숱한 리메이크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작품의 호재에도 연상호를 향한 사람들의 의구심은 피해갈 수 없었다. ‘부산행’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고루 호평을 받았지만, 과연 전작들과 견줘도 모자람이 없는가에 관해서는 모두가 조금씩 회의를 품었다. 그의 견고한 작품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던 적잖은 흠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극 중 조형된 대부분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이었고, 여성과 아이 캐릭터는 극 중 상황에 의해 그저 남성 주체에게 보호받아야 할 유약한 존재로 대상화되는 데 그쳐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리고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일련의 플래시백은 조악한 감상주의로 극 전반의 격을 저하시켰다. 마동석, 정유미 등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최우식과 안소희 등의 아쉬운 연기가 걸리기도 했다(아마 전자는 배우의 역량 덕분에 살아남은 경우일 테고, 후자는 연상호의 미숙한 연기 디렉팅 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그의 전문 분야로 회귀한 ‘서울역’은 명확한 장점과 경시할 수 없는 단점이 혼재된 불완전한 작품이었고, 올해 초 개봉한 두 번째 실사영화 ‘염력’은 작품성과 흥행 모두의 측면에서 부정할 여지가 없는 실패작이었다. 이처럼 독립영화계의 거물 연상호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변모를 꾀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나락의 길을 걸었다. 2016년의 우려가 2018년의 확신으로 물들어갈 즈음, 그를 향한 영화 팬들의 기대와 관심은 자연스레 시들어갔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품을 의문에 관하여. 왜 필자는 그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글의 서두로서 장식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선 약간의 우회를 통해 글을 이어가야 할 것 같다. 별 것 아닌 사족이라도, 엄연히 본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기점이기에. 그렇기에 마땅히 꺼낼 필요가 있는 이야기라고 믿기에. 필자는 홀로 야식을 먹을 때마다 꼭 TV로 무언가를 틀어놓는 습관이 있다. 그게 재미없는 예능이어도 좋고, 한 번도 챙겨본 적 없는 드라마여도 상관없다. 그저 밥을 먹을 때 두 눈이 심심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는 왜 굳이 TV여야 하느냐고, 휴대폰을 보면 될 것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겠다. 나로선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몸 구석구석에 제대로 박혀버린 지 오래인 지독할 습관이기에 제대로 설명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여하튼 몇 주 전 토요일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라면을 끓인 후 넷플릭스를 켠 뒤 밥을 먹으며 가볍게 보기 적절한 콘텐츠를 뒤적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부산행’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연상호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따로 놓고 본다면 본작은 나쁘지 않은, 아니 되려 꽤나 잘 만든 영화였기에, 필자는 긴 고민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꽤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기억에서 지워질 만큼 오래전에 본 영화가 아닌데도, 필자는 제 나름대로 몰입하며 라면이 불도록 영화를 ‘끝까지’ 다시 봤다.


 작품에 대한 감상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장르 영화로서 준수한 완성도를 뽐내는 수작이었고, 좀비 액션의 토착화에 측면에서 일궈낸 기념비적 성취는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전작이 안겨준 비수처럼 날이 선 충격과 감흥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재평가에 대한 여지가 전무했기에 영양가 있는 관람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겠지만, 이전과 달리 유독 한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이상하리만치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고 하겠다. 시퀀스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아수라장 속에서 주인공 일행은 의도치 않게 그들 각자에게 소중한 이들의 손을 놓치게 된다. 펀드매니저 석우(공유 분)는 그의 딸 수안(김수안 분)과, 예비 아버지 상화(마동석 분)는 그의 임신한 아내 성경(정유미 분)과, 그리고 고교 야구부 선수 영국(최우식 분)은 그의 친구이자 연인 진희(안소희 분)와 떨어지는 위기를 겪는다. 그들과의 재회를 위해, 석우를 필두로 한 주인공 일행은 좀비가 득실대는 열차 칸을 차례로 돌파한다. 13호 칸에서의 기적 같은 재회 후 비감염자 집단이 도피 중인 칸에 당도하기를 남겨둔 찰나, 본인들의 안위를 우려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땅히 들어갈 수 있었던 입구를 일방적으로 차단한다. 그 과정에서 상화와 인길(예수정 분)은 목숨을 잃게 되고, 생존한 일행은 선동에 의해 감염자로 몰려 다음 칸으로 추방당한다.


 처음 극장에서 이 작품을 관람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새끼 감염됐어! 이 새끼 눈깔 봐봐!”라며 비감염자 간의 수직적 권력 관계를 앞장서서 형성하던 용석(김의성 분)이 석우의 일행을 감염자로 선동하는 순간, 적잖은 관객들이 분노했다. 객석 한구석에서 욕설이 들려왔고, 필자의 앞과 뒤로부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후 모두가 극 중 용석의 단죄를 기대했고, 그가 상영시간 내내 끈질기게 생존하며 스스로의 퇴장을 유예시킬 때마다 유독 초조해했다.


 생각해보면, ‘부산행’은 세월호의 아픔을 상업 영화적 문법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내려는 영화였다. 상화의 죽음 이후 분노한 석우가 내뱉는 “다들 살 수 있었잖아, 미친 새끼야!”라는 일갈은 당혹스런 사고와 안타까움 죽음을 실시간으로 목도한 국민의 분노를 함축했고, 온갖 음해와 탐욕스런 행동으로 일관했던 용석은 희생자들을 외면한 채 본인의 안위와 이득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이기적인 어른들의 표상이었다. 즉, 관객들의 용석을 향한 분노와 탄식은 영화 속 인물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약자를 밀어내려는 비인도적인 척력(혹은 국가적 재난을 제대로 처리할 능력과 의지조차 의심되는 정부) 전체를 겨냥함은 물론 그들이 자연스레 연상한 2년 전의 비극을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연상호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군상을 스케치함으로써 실재했던 역사적 고통과 울분을 다시금 상기하고 보듬고자 했던 것이다.


 그날 밤에 다시 본 그 장면은, 더 멀리 나아가 오늘의 제주를 조심스레 호출했다. 현재 지역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에 있는 예멘의 난민들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후티 반군과 사우디아라비아 동맹국의 전쟁 한가운데서 안전한 곳을 찾아 예멘의 사람들은 고된 피난길에 오른다. 그들은 무비자로 일정 기간 동안 체류가 가능한 말레이시아로 도피하지만 거주 허용 기간이 만료되자 출국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마찬가지로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도민의 시선은 따갑기 그지없다. 일자리 축소에 대한 우려와 범죄율 증가 및 지역사회의 혼란으로부터 오는 막연한 불안이 난민을 궁지로 몰고 있다. 난민의 수용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70만 명을 돌파하며 여론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고, 얼마 전 열린 난민 반대 집회는 무슬림을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제노포비아적 성향이 다분한 태도로 일관했다.


 거칠게 비교하자면, 지금 예멘의 난민들이 처한 상황은 위 장면에서의 석우 일행이 겪는 비극과 깊은 유사점이 있다. 그들은 본인을 위협하는 거대한 폭력의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 집단의 내부로 들어온다. 그들의 행동은 다분히 인과적이고, 그렇기에 부정할 여지가 없이 타당하다. 생존을 바라는 그들의 행동방식은 위기에 처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며,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로의 당도와 좀비가 없는 공간을 향한 피신은 그들의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집단의 시선은 다소 잔인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이나 냉정하다. 그들의 스탠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승객들의 배척은 그들의 안위에 대한 불안의 결과였으며, 제주 도민 역시 ISIS가 심은 이슬람 혹은 외지인에 대한 공포와 취업 등 당연한 삶의 조건이 침해받을 수 있음에 대한 맹목적인 냉대를 보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감히 추측하자면 이번 사례가 난민을 비롯한 외지인의 과잉 밀집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음에 대한 염려로 해석할 여지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생각의 타당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모든 사유와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굳게 닫힌 문은 위험하고, 무엇보다도 폭력적이다. 영화와 현실 속 집단은 양쪽 모두 맹목적인 공포로 인해 진정 위험에 처한 이들을 악인으로 일반화했다. 편협한 프레임으로 타인을 해석하는 만용을 저지른 이들은, 굳게 닫힌 입구에 넥타이를 매듭을 묶었고, 위압적이고 편견 어린 집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를 공포로 오독할 때, 혹은 모름에 대한 전제를 악의 조건으로 착각할 때, 집단 속 무수한 익명의 목소리는 때로는 냉기 서린 외면이 되고, 더 나아가 폭력이 된다. 절박한 노크를 듣고도 끝내 문고리를 돌리지 않는 순간, 문은 더 이상 문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 이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과거의 아픔을 상기하려는 2년 전 연상호의 눈에서 오늘의 난맥을 짚어냈다. 그의 영화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난잡하게 흐르던 생각은 그의 최근작 ‘염력’에 다다랐다. 이제 그는 작가로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확신으로 굳혀버린, 그만큼 얕고 천박한 만듦새의 태작. 책임감 없는 가장이자 하릴없이 오늘만 살던 모자란 남자가, 우연히 얻게 된 염력으로 대기업의 횡포와 용역들의 폭압에 맞서 자신의 딸과 골목상권을 구한다는 이야기. 영화는 적극적으로 용산 참사의 기억을 되살린다. 철거와 화재, 그리고 망루의 기억. 상인과 경찰 모두에게 벗어나고픈 지옥과 같았던 시간. 하지만 영화는 당시 사건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비틀어버리려는 듯 시간을 거꾸로 돌려, 거기에 없었던 초자연적 인물 하나를 세계에 떨궈 놓는다. 비록 양심과 책임이란 안중에도 없는 하찮은 존재였지만, 뜨거운 투쟁의 현장 속에서 남다르게 각성하는 사람. 게다가 우리가 익히 아는 참사의 쓰라린 결말을 다시 쓸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 가정법의 힘을 믿는 작가 연상호는 그를 바늘 삼아 당시의 기억을 픽션으로써 재단한다. 다행히도 철거민과 경찰 그 누구 하나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실제로 철거민들이 짊어진 과한 처벌은 장르적으로 조각된 '슈퍼히어로' 석헌(류승룡 분)이 대신 감내한다. 몇 년 뒤 형을 다 산 그는 훗날 그의 사위가 될 인권변호사 정훈(박정민 분)과 딸 로미(심은경 분), 그리고 사투 끝에 구해낸 많은 상인들과 호프집에서 행복한 재회를 한다.

 결국, 연상호에게 가정법이란 가장 강력한 영화적 무기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창작자 본인의 간절한 바람에 기반해야 온전히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참혹한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혹은 이에 저항함으로써 2009년 1월의 역사가 폭력과 죽음이 아닌 연대와 인간애의 증명이었길 소망했던 것이다. 그 공상이 이를 데 없이 허망하며, 현실의 참사를 생채기 만큼이라도 바꿀 수 없음을 그 역시 잘 알 것이다. 또한 '염력'의 방법론이 그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도피에 지나지 않느냐는 반론 역시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마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으리라. 그는 그저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빌려, 본인의 바람을 따스하게 품은 한 움큼의 몽상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을 테니까. 아마도, 그게 전부였을 테니까.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변명의 여지는 없다. 코미디의 타율은 낮다 못해 새삼 낯부끄러워질 수준이며, 영웅 서사는 지나치게 단조롭다. 용산 참사는 물론 종북몰이 등 지난한 사회적 이슈들을 언급했지만, 예술이란 '무엇'이 아닌 '어떻게'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그 무엇 하나 적절한 화술로 능숙하게 다뤄내지 못한다. 더군다나 전개는 유기적이지 못한 채 시종 산으로 향하고, 극의 분위기는 종종 뜨악해질 만큼 유치해진다. 사회적 함의와 주제의식이 어쨌든 간에, 못 만든 영화는 그냥 못 만든 거다. 그럼에도 위와 같이 조금은 다른 각도로 영화를 바라보자,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염력'에 일말의 애정은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친구의 팔을 끝내 놓지 못하는 남겨진 사람의 눈물은 투명하게 아른거린다. 모두가 결말이 비극적임을 아는 참사의 현장에 존재할 수 없는 영웅을 호출하려는 가정법은 헛되지만 찬란하게 빛난다. 연상호의 눈물은 우리들의 환부를 적셨고, 그의 몽상은 잿빛 세상에서의 연대와 투쟁을 이야기했다. 순진하지만 애수어린 그의 꿈은 무참한 대지에 뿌리내려 오늘에 닿는다. 그의 소망은 줄기를 타고 나에게 도착하고, 그 간절함이 나의 염원과 다르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그의 기도를 이제서야 실감했음을, 간절히 모은 손의 온기를 애써 간과하고 부정하려 했음을 이 글로써 조심스레 고백한다. 지평선을 향해 힘껏 던진 유리병에 금이 가더라도 그 속에 담겨 떠밀려온 편지의 진심이 변치 않듯, 스크린에 고이 아로새긴 연상호의 희망은 작품의 아쉬운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의 변화가 변질의 징조가 아닌 소망의 표현일 수도 있음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훗날 스크린에 몇 번이고 더 만개할 그의 바람을 응원하며, 기대를 걸어보며.


사진 출처-http://news.maxmovie.com/258049

사진: 김소연


글쓴이 - 고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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