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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Oct 21. 2018

시냇물처럼 _왔다 갔다

[3_수필]


 ‘자만은 내가 사는 세계에 단단한 벽을 만들어 결국 손해 보는 것밖에 안 된다.’ 

SNS 스크롤을 하다 우연한 칼럼에서 읽은 문장이었다. 그 한 마디가 머리에 콱 박혀 며칠을 맴돌았다. 자만이란 단어와 내가 그리 어울린다 생각하지 않지만, 간혹 쉽게 자만의 틀을 적용할 때가 있다. 남이 처한 상황을 너무 쉽게 이해한다고 하는 것. 혹은 너무 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정말로 마음으로 이해가 되는 것. 종종 자만과 이해의 중점이 교차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 사건, 혹은 환경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살아낸 시간과 순간순간 끌어온 감정, 불완전한 그 날의 느낌, 기억, 그가 지새운 모든 밤을 감히 내가 나의 깊이로 재고, 예상하여 나온 말이라 생각한다. 그간 짧게나마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고 매스컴에서 비추지 않는 역사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에 없던 사람의 온기와 손 뻗는 마음을 배웠다. 배웠다기보단 몸이 저절로 알게 됐다. 눈물과 고통으로 악착같이 살아온 날들이 모여, 여러 사람의 뜨스운 열망이 모여 내뿜는 힘. 꾸며지지 않은 아주 작은 소망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 오만가지의 갈등이 교차하는 세상에 하나 됨으로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것. 차이와 다름을 이해하고 각자의 자리를 존중하는 것. 작지만, 소박하지만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것.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운동, 세월호, 성 소수자 단체, 동물권 운동, 여성 운동가들, 강정마을,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소리 내며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게 참 많았다.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지정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그게 나의 주변 일이고, 이 사회에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약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모든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남과 남이라는 생각의 틀이 무너지자 자연스레 더 아프고 힘겨운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고 시간을 함께했다. 그런 만남을 이어오고 생각의 폭도 넓어지다 보니 언제부터 나는 감히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실제로 덕분에 많이 유연해질 수 있었다. 생각과 사상의 차이에서 만난 사람들을 타도하거나 배척하기보단 그들을 시대적, 환경적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다른 점을 찾아 배웠다. 

근데 함부로 내가 대상의 깊이를 재고 지녀온 시간을 예측해 하는 생각은 뭔가 다른 거 같아 요새 멈칫하는 부분이다. 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무척 강하고 또 자신하는 부분이 많다. 이 세상을 나대로 살아가려면 그래야만 했던 나의 방법이다. 덕분에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될 순 있었지만 지나친 다 안다는 공감과 이해는 쓴맛으로 다가왔다. 내가 하는 이해의 방식이 자만인가, 진심인가 라는 의문이 계속됐다. 말을 줄이고, 그게 진심이더라도 예의상 오가는 공감의 말을 줄이고 더 침묵하며 듣고 여러 번 생각한 후 깊은 말들을 내뱉기로 했다. 언어의 방식이 누군가에겐 큰 오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됐다. 한참을 눈을 맞춰가며 듣고 그제야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조언이나 공감을 표하는 것이 상대가 긴장을 내려놓고 오직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방식의 제공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으로 나만의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결단 짓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마다 감정을 묻어둔, 중점을 기울이는 이야기가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른데 나의 일인칭 시점을 작용하기엔 그 사람을 지워버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듣는 방식을, 대화의 방식을 바꿔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내 말을 많이 하기보단 더 듣고, 친분이 없는 사람마저 나에게 편히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상황들이 찾아왔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내게 와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참 고맙다고 느낀다 아직도. 

이십 년 채 세상 안 살아본 내가 종종 느끼는 건 이 세상엔 들을 줄 아는, 진짜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어른이 몇 없다는 것이었다. 듣기도 전에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개념으로 말하는 이의 삶을 정의해 버리거나 판단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사람들이 대화하고 마음 내는 법을 잃어간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그런 어른이 되진 말아야지, 대상의 나이와 성별, 위치가 어떻든 한결같이 잘 들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사람이 설령 차가운 얼음 같은 말을 내게 쏟아내도, 분노로 가득 차 불같은 언어를 내뱉어도, 모든 게 지쳐 무감각함의 끝판을 보여주어도 나는 시냇물같이 조용히 들으며 그 사람이 다시 흐를 수 있는 힘을 줘야지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이곳저곳, 다양한 온도를 왔다 갔다하며 환경도 무쌍하게 변한다. 한 사람이 인생의 한 지점에 정차하는 일이 없듯 나는 흐르며 누군가와 함께하기도 때론 혼자인 모습으로 잘 듣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소리와 이야기와 세상에 유연한 사람이 되어 가득가득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바람이다.                

물레, 물레방아처럼 성장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되자 하여 물레가 되었다. 종종 마음이 가는 장면을 사진에 담고 글을 쓴다. 더욱더 틀에서 자유로워지고 내 느낌에 귀 기울이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글쓴이 - 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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