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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Oct 21. 2018

기억꽃:왔다간 흔적

[6_minifiction]

주문한 고구마가 도착하지 않는다. 고구마를 기다리는 동안 꽃씨를 선물 받았다. 미아의 아파트에는 화단도 없고, 마당도 없다. 미아는 꽃씨를 심을 화분과 흙을 샀다. 흙을 사다니. 미아는 래미가 좋아하던 쌍쌍바를 혼자 먹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흙 같은 건 자연 발생하는 건데. 쌍쌍바는 함께 먹던 맛이었다. 이러다 물도 사서 뿌려줘야 할지도 몰라. 골똘히 생각하다 혼잣말을 바깥으로 내뱉었다. 혼자 다 먹기에는 조금 많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수도세도 내고, 생수도 사 먹고 있었다. 봉이 김선달이 요즘 태어났다면 대동강 물이 아니라 산소를 팔았을 것이다. ‘편백나무 숲에서 채집한 1등급 친환경 산소’ ‘자동차가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는 외딴 섬 스페셜 산소’. 미아가 걸을 때마다 흙을 담은 검정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래미가 준 꽃씨를 심기 위해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다. 한달 전 신문에는 심각하게 우려된다는 내용이 차고 넘쳤다. 우려의 세계 위에 화분과 흙을 올려놓았다. 포장지에는 '실험용 거름흙'이라고 쓰여 있었다. 고구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수확이 조금 늦어지나 보다. 미아는 꽃씨를 심으며 기다릴 것이다. 화분에 흙을 느슨하게 담고 검지로 손가락 길이만큼 뚫었다. 똥깡아지 눈망울 같은 씨를 구멍에 넣고 흙을 덮었다. 꾹꾹 눌렀다. 꾸-욱 하고 몇 번을 더 눌렀다. 마른 흙이 흠뻑 젖을 때까지 물을 주었다. 물이 화분 밖으로 흘러나왔다.


낮에는 햇볕을 쬐라고 화분을 복도에 내놨다. 외출하고 돌아오자 화분 위에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누군가 집 앞에 왔다 갔거나, 7층에 사는 누군가 복도를 지나다 재떨이로 사용한 것이다. 미아는 꽁초를 줍고 흙의 매무시를 다시 만졌다. 꽁초를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꽁초만으로는 누가 어쩌다 화분에다 꽁초를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필터가 꺾어진 것으로 보아 던진 것이 아니라 흙에 담뱃불을 비벼 끈 것 같았다. 미아에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씨앗.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잘 키우고 싶은 꽃. 다시는 화분을 밖에 내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화분을 집안으로 들였다.

 

고구마가 오늘 내로 도착할 것이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아는 화분을 노끈으로 묶은 뒤 베란다 창문 난간에 매달았다. 비를 한 차례 맞고 나면 싹이 틀 것이다. 여러 번 꼬아 만든 끈은 제법 탄탄했다. 건물들이 어둠에 경계를 지우기 시작했지만 오늘 내 도착할 것이라는 고구마는 결국 도착하지 않았다.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자신만을 의지하며 지내는 것보다 두려운 건 없었다. 바깥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창 틈으로 들어온 스산한 소리가, 이제는 침묵에 휩싸인 집안 곳곳에 파고들었다. 창문 밖 은행잎의 그림자가 거실 바닥에서 너울거렸다. 마치 나비의 영혼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비의 날갯짓에 홀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을 열어두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보니 난간에 걸어둔 화분에 주홍색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의 넝쿨은 난간을 감고 거실까지 뻗처 있었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이상한 일이었지만 흙도 사고, 생수도 사는 시대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어제 오기로한 택배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202동 704호가 아니라 201동 704호로 배달했다고 했다. 주소가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했다. 확인해보니 미아는 주소를 농장주인에게 바르게 전달했다. 택배 담당자는 쓰여 있는 주소로 차질없이 배달했다. 농장주인은 어쩔 줄 몰라했다. 일단 미아는 201동으로 갈 채비를 했다.


아파트 출입문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 수 있었다. 미아는 704호를 호출했지만 인터폰 너머는 조용했다. 경비실을 찾아가 봤지만, 경비원은 없었다. 아파트 청소하시는 분이 근처에서 주어온 캔을 재활용 통에 담고 있었다. 그에 손등에는 버즘이 피어있었다. 미아는 이곳 경비원이 언제 오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바람이 꽤 쌀쌀해졌다. 청소하던 할아버지는 주황색 쓰레받이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 하나를 쓸어 담으며 경비원 없앤 지 한참이라고 대답했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택배 관련 문의는 관리사무소 보안담당자를 찾아가면 된다고 일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파트 미화원은 미아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보안담당자를 찾아가 다시 한 번 사정을 이야기하자 201동 704호에 전화를 넣었다. 미아는 잘못한게 없었지만 택배 담당자에게도 농장주인에게도 미아가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수십 번 호출에도 대답이 없던 704호가 전화를 받았다. 미아는 고구마가 잘못 도착한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704호. 미아와 같은 호수지만, 다른. 현관문이 훨씬 고급인 201동 704호. 미아가 사는 202동엔 출입문이 없지만 201동 출입문은 잠겨있었다. 202동에는 아직 경비원이 있지만 201동에는 경비원이 없었다. 경비원이 사라진 201동 경비원 처소에는 방치된 물건들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거기엔 이불도 개켜 있었다. 때 지난 이불보다 필요없어진 경비원.


40대 초반의 여자가 704호 현관문을 열며 고향에서 온 선물인 줄 알고 이미 절반을 먹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가 해남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고구마는 해남산이었다. 미안하다는 여자에게 뭐라고 해야 했을까. 한껏 가벼워진 고구마 상자를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미아는 피식 웃었다. 받는 이 이름이 분명 달랐을 텐데. 어제 도착했을 상자에는 고구마가 10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사이 핀 꽃은 그새 얼마나 자랐을까.


그 정도의 생장속도라면 일상은 곧 넝쿨에 뒤덮일 것이다. 마른 칫솔, 좋아하던 머그잔, 스탠드, 달력, 선풍기, 읽다 만 책 곳곳. 발디딜 틈 조차 없이 온통. 경비원 처소에 방치된 물건처럼 가득. 침대까지 휘감은 넝쿨에 몸이 배겨 깊이 잠들 수도 없을 것이다. 뜯어내도 뜯어내도 다시 자라나는 넝쿨. 먹어도 먹어도 쉽게 줄지 않는 쌍쌍바. 바람에 바들거리는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다


턱에 걸려 넘어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자색 고구마 몇 개.


글쓴이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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