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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에 매혹되다

에필로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늘 대화의 화제가 현실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좋아했다.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곧 내가 닮고 싶은 세계였다. 그곳은 나의 뿌리가 있는 곳이라 여겨졌다. 집으로 가는 버스 창가에 내리비치는 석양빛을 볼 때마다 문득 생겨나는 그리움은 추상적인 세계에서 온 내가 그 세계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두발을 현실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 속의 말들은 나의 뿌리가 여전히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때때로 군중 속의 외로움은 늘 사람의 부재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나 내가 갖는 외로움은 내 옆의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세계를 잊고 살아가는 군중 속에서 그 세계를 혼자 애도하고 있는 듯한 마음 때문이었다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좋아했던 이유는 나의 존재가 그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앞에 부유하고 있는 듯한 현실들이 그 추상적인 세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어딘가로 향하던 나의 추상적인 생각들은 현실 속 뿌리를 잃어버린듯한 공허한 느낌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던 가장 현실적인 단단함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는 왕자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랐지만, 노인, 병자 죽음을 목격하고 삶의 고통을 깨닫게 된다.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그는 6년간 극심한 수행을 했으나 극단적인 고행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쾌락도 고행도 아닌 중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보리수나무아래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던 그는 마침내 열반에 들게 된다


때때로 삶을 살아가면서 나의 존재가 지닌 외로움이 컸던 이유는 내가 가진 근원과 멀어진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전체적인 느낌을 잃은 채 눈앞의 현실에 붙들려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삶이 아닌 현실을 보는 순간, 자아는 눈앞의 대상이나, 사물, 사람에 스스로 구속되어 버린다.

그때에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들은 나무아래 앉아 저 스스로 현실을 지어내고 있는 반응들을 계속해서 깨트리는 것이었다.

눈앞의 것이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나의 윤회는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눈앞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있을 수 있고 발사이로 비비며 들어오는 고양이에게 있을 수 있으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정오의 바람 속에서 문득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질 수도 있다. 나라고 부르는 것이 사라진 곳에는 모든 생명이 들어선다. 현실적 정체성에서 붙들려 있던 자아가 해방되고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관찰하는 주시자로 남아있지만, 모든 것이 되는 전체적인 시야는 본래의 나를 깨닫게 함으로써 고요히 쉼을 얻는다.

삶이 좁은 자아의 벽을 떠날 때, 존재는 삶 속에 혼자라는 분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의 모든 인연을 끊고 본래면목이라는 곳에 들어서면 넘치는 생명들의 미소가 화답한다.

삶을 구원할 길은 일상이라는 탈을 쓴 진리의 어떤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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