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의 진짜 싸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블록사이즈 전쟁 이후: 비트코인의 진짜 싸움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서론: ‘사용자가 통제하는 돈’이라는 실험
비트코인은 2009년 등장 이후 15년 가까이 생존했습니다. 그 존재의 이유는 단순한 디지털 화폐가 아니라 “사용자가 스스로 통제하는 돈”이라는 전례 없는 실험입니다.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발행하고 조절하는 법정화폐와 달리, 비트코인은 누구의 허락도 없이 사용할 수 있고, 거래 자체가 검열되지 않으며, 공급량이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비트코인은 수차례 생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블록사이즈 전쟁(Blocksize War)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단순한 기술 논쟁으로만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비트코인의 정체성과 미래를 가른 중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블록사이즈 전쟁의 발단
비트코인의 블록체인은 약 10분마다 1MB 크기의 블록을 생성합니다. 1MB라는 제한은 초기에 보안상의 이유와 스팸 방지를 위해 설정된 임시적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성장하고 거래가 폭증하면서 1MB 제한은 병목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 무렵, 비트코인의 TPS(초당 거래 처리량)는 평균 3~7건에 불과했습니다. 비자(Visa)가 초당 1,700건 이상을 처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결제 네트워크로서 경쟁력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네트워크가 포화되자 거래 수수료는 치솟았고, 전송 지연은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커뮤니티는 “블록 크기를 늘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확장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진영의 대립
빅블록(Big Block) 진영
주장: 블록 크기를 2MB, 4MB, 심지어 8MB 이상으로 늘려 거래 처리량을 즉각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논거: 수수료를 낮추고 거래 속도를 높여야 대중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현금’으로 설계되었으니, 비자 같은 네트워크와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과: 2017년 8월, 일부 커뮤니티와 채굴자가 결별하여 하드포크를 단행. 그 결과 비트코인 캐시(BCH)가 탄생했다. BCH는 블록 크기를 8MB로 확대했으며, 이후 32MB까지 늘렸다.
스몰블록(Small Block) 진영
주장: 블록 크기를 크게 키우면 노드 운영 비용이 급증해 개인이 네트워크에 참여하기 어렵다. 이는 중앙화와 검열 위험을 높인다.
대안: 온체인 확장이 아니라 세그윗(SegWit), 라이트닝 네트워크 같은 오프체인·레이어 2 기술로 확장성을 확보하자.
철학: 비트코인의 본질은 빠른 결제 시스템이 아니라, 검열 저항성과 탈중앙성이다. 거래 처리 속도는 희생하더라도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돈”이라는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결과
2017년 11월, ‘세그윗 2x’라는 타협안도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커뮤니티의 대다수는 스몰블록 진영에 동조했고, BTC(원래의 비트코인)는 1MB 제한을 유지하며 세그윗을 채택했습니다. 반면, 빅블록 진영은 BCH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블록사이즈 전쟁의 의의
블록사이즈 전쟁은 단순한 성능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비트코인이 무엇을 위한 프로젝트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습니다.
빅블록 진영: 비트코인은 “결제 혁신”
스몰블록 진영: 비트코인은 “금융 주권”
결과적으로 시장은 스몰블록 진영의 철학을 선택했습니다. 2023년 기준 시가총액은 BTC가 약 5,000억 달러를 유지하는 반면, BCH는 40억 달러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는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의 본질을 “검열 저항적 가치 저장 수단(Store of Value)”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줍니다.
다가올 진짜 전쟁: 검열 저항
블록사이즈 전쟁은 내부의 이념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협은 외부에서 옵니다. 중앙화된 화폐 시스템의 수혜자들, 즉 정부와 금융 기득권이 본격적으로 비트코인을 견제할 시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예상 공격 수단
특정 주소·거래 블랙리스트화
규제기관을 통한 거래소 압박
자산 압류 및 세무 추적
채굴자 규제와 에너지 사용 제한
이 전쟁의 초점은 블록 크기가 아니라, 검열 저항성 자체가 될 것입니다. 만약 특정 정부가 네트워크 일부를 장악해 거래를 무효화하거나 제한하려 한다면, 비트코인의 존재 이유는 근본적으로 도전받게 됩니다.
OP_RETURN 논쟁과 블록 공간의 정치학
OP_RETURN은 블록체인에 소량의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이를 통해 디지털 서명, 계약, NFT 메타데이터 등이 기록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블록 공간의 희소성과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거래 데이터가 아닌 임의 데이터를 대량으로 기록하면, 블록이 불필요하게 비대해져 네트워크 부담이 커집니다. 스몰블록 진영은 이를 “본질에서 벗어난 사용”으로 보았고, 효율적 사용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블록사이즈 전쟁의 연장선입니다. 결국 쟁점은 단 하나, “블록체인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역사적 반복 가능성
블록사이즈 전쟁에서 빅블록 진영은 인센티브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블록 크기가 커지면 노드 운영자가 줄고, 이는 권력 집중으로 이어집니다. 스몰블록 진영은 이 약점을 정확히 짚어내 승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와 금융 기득권 역시 비트코인의 인센티브 구조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강압적 규제가 오히려 채굴자와 사용자를 지하로 몰아넣고, 네트워크를 더 분산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즉, 억압은 반작용을 낳는다는 점에서 역사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장기적 전망
거래 처리 한계: 레이어 2 확장은 필수. 라이트닝 네트워크의 채택률은 아직 낮지만, 매년 성장세를 보이고 있음.
규제 압박: 미국 SEC, 유럽연합 MiCA 규제 등에서 드러나듯 제도권은 점차 직접 개입 중.
사용자 주권: 개인이 직접 프라이빗 키를 보관하고, 자체 노드를 운영하는 문화가 강화되어야만 검열 저항성이 유지됨.
결론: 꿈은 아직 살아 있다
블록사이즈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다음 전쟁의 무대는 블록 크기가 아니라, 국가와 금융 권력이 비트코인의 심장부인 검열 저항성을 직접 공격하는 순간 열릴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블록사이즈 전쟁을 통해 비트코인은 탈중앙성과 사용자 주권이라는 본질을 지켜냈고, 더 큰 싸움에 대비할 경험을 쌓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전 세계 어디선가 한 개인이 자신의 지갑에서 비트코인을 전송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국가도, 어떤 기업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온전한 금융 주권을 가진다는 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