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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Aug 04. 2022

동쪽으로 이사 왔습니다

: 타닥타닥 제주에서 5주 차

29일, 선수 교체


 엄마와 언니, 조카들이 떠나고 남편이 돌아왔다.

 1주일 만의 귀환이다.

 떠나는 이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 돌아오는 이에 대한 반가움이 서로 뒤섞인 선수 교체가 있었다.

 

(영상 소리 주의!)  제주시 용담동에 위치한 용담포구 근처에 가면, 비행기가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0일, 동쪽으로 이사 왔습니다.


 당초 계획했던 일정보다 5일이 연장되면서 급하게 숙소를 잡아야 했다. 여름 성수기인 탓에 대부분의 숙소들은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적당한 숙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한경면에서 동쪽에 위치한 표선면으로 숙소를 옮겨야 했다. 숙소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제주도의 서쪽과 동쪽은 겉으로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구석구석 마을의 느낌이 많이 달랐다.

 서쪽 지역은 제주도의 시골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이다. 숙소가 마을 안에 위치한 탓도 있지만, 입소문을 타서 제법 유명한 식당이나 카페들도 거친 밭과 투박한 시골집들 사이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해안 일주도로에서 벗어나 산간지역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아스팔트가 아닌 시멘트로 된 도로가 나온다. 다듬어지지 않은 숲길 사이를 달리다 보면, 어쩌다 민가가 하나 둘 보였다. 반면, 동쪽은 상대적으로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서쪽보다는 관광지가 많아서 정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제주도 서쪽 한경면 신창리 풍경은 실제 주민들이 경작하는 밭과 살고 있는 집들이 많다.
제주도 동쪽 표선면에는 민속마을이 위치해 있다. 마을 전체에 이런 집들이 오망 조망 모여 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자, 다음날 아침부터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에서 곧장 걸어 나갔던 산책이 불가능해졌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했던 서쪽 숙소와 달리 동쪽 숙소는 조금 외진 곳이고, 인도가 따로 없어서 차 없이 걸어 나가기가 위험했다. 그리하여 둘째 날 아침, 차를 가지고 가까운 오름에 가보기로 했다. '영주산'이 당첨되었다.


 * 영주산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해발고도 326m의 산이다. 제주도에는 '오름', '봉', '산'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 많다. 대부분 화산이 분화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한쪽으로 용암이 흘러나가면서 말발굽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영주산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듣도 보도 못한 풍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응? 네가 거길 왜 올라가고 있어?

영주산 입구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나무계단을 소 한 마리가 오르고 있다. (우측 상단, 계단 끝 부분에 보입니다)


 소 한 마리가 나무 데크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소다! 그건 시작이었다. 소를 따라 올라간 계단 너머에는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음~모~~!!! 소떼다!

영주산은 소 방목지다. 소 떼들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래서 소똥도 많다.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외양간 소가 아닌, 이렇게 많은 소가 자연에 풀어진 채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나의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무서웠다. 자유로운 소들의 눈빛은 외양간에 매여 있는 소들과 달라 보였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소들의 시선이 우리를 정확하게 응시했다. 날카로운 뿔과 육중한 그들의 몸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떼창을 하듯 울어대는 소리도 두려웠다.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떠한 울타리도 없다는 것이, 그들은 더 이상 갇혀 있지 않고 나와 동등하게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이 낯설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광경이었고, 소들은 우리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우리를 잠시 응시하다가, 우리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관심을 거두어갔다.

 무리에서 떨어진 송아지 한 마리가 음매~ 울면서 걸어왔다. 대장으로 보이는 한 소가 무리를 가리키며 음모~~~ 운다. 분명 두 소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고삐 풀린 소들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새로운 풍경들이 자꾸 내 안에 들어와 굳어져 있던 생각들을 뒤집는다. 바람이 불듯, 파도가 일듯, 마음이 넘실거리게 만든다. 그 일렁임이 좋아, 자꾸 웃음이 난다.



31일, 태풍이 올라옵니다.


 밤사이 5호 태풍 '송다'가 올라왔다.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비바람이 거세서, 오늘 일정은 카페에 앉아 조용히 밀린 글을 쓸 생각이었다. 계획은 언제나 빗나가기 일쑤여서,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긴 탓에 카페에 앉아 일을 했다. 일을 하는 틈틈이 카페 천정을 때리는 빗소리를 녹음하고, 어제 찍은 사진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태풍이 올라오기 전, 어제부터 바다의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햇볕은 여전히 쨍쨍하고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데, 오직 바다만큼은 뭔가 달랐다. 파도가 크고 빨랐다. 우와... 튜브 2개, 핸드폰 방수팩 2개, 모자 2개, 다이소에서 5천 원에 급히 구입한 아쿠아슈즈 2개를 챙겨 들고 표선 해수욕장으로 뛰어갔다. 제주도 서쪽의 금능, 협재 해수욕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좋다!

 물에 젖는 것도, 몸을 쓰는 활동적인 놀이도 즐겨하지 않는 남편이 어쩐 일인지 흔쾌히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밀려오고, 덮치고, 지나갔다.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고, 덮치고,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파도가 우리 몸을 사정없이 치고 지나갈 때마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졌다. 마음속 근심 걱정들이 하나씩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튜브에 몸을 싣고 파도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남편의 얼굴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결혼을 한 지 6년 만에 이토록 해맑은 표정은 처음이다. 어떤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순도 100%의 해맑음 표출이다. 이 원초적인 놀이가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몸을 뒤흔드는 것뿐인 원초적인 놀이 앞에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무장해제되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다. 워터파크 인공 파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자연의 파도 맛을 제대로 봤다. 태풍 덕분이다.

파도를 넘고, 넘고, 넘는 그의 사진을 오늘도 과감히 브런치에 올린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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