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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Aug 01. 2022

숏컷 해주세요.

<나의 아줌마 관찰기>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숏컷을 했다.

머리를 자르고 나니 사람들이 자꾸 내게 묻는다.

“왜 잘랐어?”


그냥.

답답해서.

진짜 시원해!


short 답은 위와 같고, long 답은 아래와 같다.




1. 그냥


미용실에 돈 깨나 썼다.


가장 맘에 든 곳은 압구정의 A 미용실.

오전 10시. 입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기 살결 같은 향기가 나고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한 스태프들, 정갈하며 쾌적한 곳이다.


엄마가 물려준 다갈색 머리털 한 올 한 올이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구름펌도 하고 레인펌도 하고 번개컷 천둥컷 바람컷(땅 불바람 물 마음)도 했다. 비싼 값을 주고.

유구하게 흘러온 세월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언제나 가장 바라던 스타일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 머리다.


끈이 가느다란 가죽 가방을 등에 멘 그녀가 핑크톤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해 ‘견우’ 앞자리에 털썩 앉아서는 갑자기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 장면. 슬로우로 뿌옇게 흘러가는 바로 그 장면을 본 이후로 쭉 그랬다.


“손님. (이빨 꽉) 죄송하지만 이건…” 소리를 듣을까 봐 한 번도 내밀어 보지는 못했던 그 머리 스타일.

머리칼이라도 닮아 보려고 긴 머리를 오래 유지했지만 내가 원하는 그 스타일은 낮 기온 26도 이하, 습도는 45% 이하에서만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온습도계가 해당 범위를 벗어나거나, 목덜미에 머리칼이 쩍쩍 달라붙을 때, 바닥에 많이 떨어져서, 음식에 빠질까 봐, 기타 등등 다양한 이유로 머리카락은 땡땡한 고무줄로 힘 있게 묶이거나 집게로 틀어 올려 분수처럼 머리칼 끝을 하늘로 풋쳐 핸섭 했다.


청초한. 그러니까 포카리 스웨트 클린 앤 클리어 뉴트로지나 포밍 클렌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달에 열아흐레는 잔뜩 화가 난 공작새 꼬리 스타일로 다녔다. 나머지 아흐레는 레트리버 꼬리 스타일, 남은

이틀만 전지현.. 아니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스타일. (김도균 씨 팬입니다.)


내가 추구하던 스타일이 이게 맞나?


스타일 찾기는 시간을 더 거슬러 학교 체육 시간으로 간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시험을 앞둬 야외 수업 대신 교실에서 자습을 하기로 했다. 그날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라는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험문제보다도 나의 20대가 더 궁금했다. 신문에서 이 책의 광고를 발견하고 서점에서 구입해 읽었는데 (체육 선생님은 너의 10대부터 제발 챙기라고 하셨다.) 책에서는 말했다. 비록 당신이 미인이 아니더라도 ‘미인의 이미지’를 늘 만들어 가라고.


미인의 이미지란?


덕분인지 20대의 대부분을 미인에 대해 생각하느라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VOGUE> 표지의 음울하고 어딘가 혈액 순환이 안 되는 것 같은 수족 냉증의 미인들 보다는, 비타민 D 수치가 평균 이상을 웃도는 내장이 건강한 <COSMOPOLITAN> 건치 미인들에게 더 끌렸다.

흡혈 미인부터 라틴살사 미인까지 (?) 누가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 나 혼자 미인 월드컵을 펼쳤다.



2. 답답해서


미의 다양성을 탐닉하던 소녀는 자라나 얼결에 아줌마가 되었고 그 아이가 어린이집에 등원 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스스로와 작은 다짐을 하나 했다.


감히 ‘다짐’이라고 말해도 되나 싶을 만큼 별 것 아니다. 매일 머리를 감을 것. 감지 않은 머리로 하루를 보내지 않을 것.


아침의 5분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눈을 뜨자마자 뇌는 바쁘게 들어오는 정보들을 처리하며 오늘의 to do list를 자동 정렬한다.


날씨를 확인하고, 그에 걸맞은 의복과 준비물을 챙긴 뒤, 아침 영양제, 씻기고 먹이는 매일의 루틴과 새롭게 갱신되는 돌발 이슈들로 머리 감기는 다른 것에 대체되고 대체되다가 순위에서 점차 밀려나기 일쑤였다.


심지어 <현재 절반이 차있는 음쓰 봉지를 마저 채워서 물이 뚝뚝 새지 않게 재활용 박스로 받쳐서 버리기> 따위에 <머리 감기>가 밀려나기도 했다.


매일 아침 머리 감기.

누가 들으면 풋 웃어버릴 별 것도 아닌 다짐을 나는 지키기가 어려웠다.

이 별 것 아닌 일을 자꾸만, 반복적으로, 잘 해내지 못하자 나는 가랑비에 옷 젖듯 의기소침해졌다.

‘뭘 그깟 일로 의기소침해 바보 같은 생각 떨쳐버려 네 머리에 아무도 신경 안 써 왓에버?’ 할 만큼 대범하지 못했다.


아, 이 ‘별 것 아닌 것’의 참을 수 없는 ‘별스러움’



3. 이제 시원해


그리고 얼마 전 합정동의 미용실에서 숏컷을 했다.  


4만 4천원 주고 잘랐다. 자르기 전에는 겁났는데 자르고 보니 별 것도 아니었다. (허세)

4주에 한 번꼴로 동네에서 다시 다듬는다.  

매일 머리를 감는다. 더운 날은 하루 3번도 감는다. 드라이에 드는 소요시간은 3분이고 손질을 더해도 5분이면 족하다.


질끈 묶거나 가닥가닥 엉겨있지 않아도 된다. 모공에 푸른 바람이 통한다. 싱그러운 냄새.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매일 존중받는 느낌이다.

바람에 마른 보송보송한 머리칼을 더 자주 쓸어 넘긴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금세 빠져나가는 머리칼의 촉감. 짧아서 아쉽고 아름다운 나의 쇼트 머리.


좋은 점은  있다. 헌데 말하자면 너무 길어 열거하기 힘들므로 부디 당신이 발견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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