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이니 지금부터 27년 전 이야기다. 당시에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어서 나 역시 www.jeongyoungki.com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국가에서 인터넷 교육을 무료로 시켜주던 때라, 나는 대전의 한 대학교에서 3개월 과정 교육을 받고 있었다. 교육비와 교재비가 모두 무료였으니 정말 좋은 기회였다. HTML을 배우고, 이미지에 링크를 거는 법을 익히며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하루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조교가 새로운 교재를 나눠주었다. 교수님은 “지금 나눠준 책의 몇 페이지를 펼치라”라고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페이지를 펼쳐보니 교수님의 설명과 맞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앞뒤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며 찾아봐도 설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설명은 이어지는데 책에는 그 내용이 없다. ‘나만 못 찾는 건가? 내가 바보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을 슬쩍 살펴봤지만 다들 조용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때 뒤쪽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큰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책이 우리 책이랑 다른 거 아니에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런 것 같다”, “맞아 맞아”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교수님은 앞자리에 앉은 학생의 책을 확인하더니, 자신은 이전 판 교재를 기준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학생의 외침 이전까지 우리는 약 5분 동안 “이거 뭐지? 이상한데, 나만 못 찾고 있나”라는 자책과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 한마디 덕분에 우리는 그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장면은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가 말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떠올리게 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합리성은 개인이 혼자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말하고 이해하며 동의에 이르는 의사소통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당시 교실에서는 교수의 설명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교수와 학생 사이의 전제가 어긋나 있었다. 교재가 다르다는 사실이 말로 드러나지 않는 한, 의사소통은 겉으로만 유지될 뿐 실질적으로는 실패한 상태였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 실패가 처음에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개인의 무능으로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교재가 잘못됐다”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이해를 못 한다”라고 생각하며 침묵했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보면, 뒤쪽 학생의 질문은 단순한 확인 요청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다시 합리적인 궤도로 돌려놓은 행위였다. 그 한마디는 깨진 전제를 공론장 위로 끌어올렸고, 개인의 혼란을 집단적 이해로 전환시켰다. 합리성은 권위자의 설명에서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분위기와 질문할 수 있는 용기 속에서 비로소 작동한다는 사실을, 그날 우리는 몸으로 배웠다.
이런 일은 교실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가정이나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 간 대화에서 한 사람이 특정한 약속이나 암묵적인 규칙을 전제로 행동할 때, 다른 가족 구성원은 그 전제를 공유하지 못한 채 갈등을 겪는다.
예컨대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오갈 때, 상대는 ‘당연함’의 기준을 묻지 못하고 스스로를 예민한 사람으로 여기며 침묵한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가 그걸 언제부터 그렇게 약속했지?”라고 묻는 순간, 갈등은 비난이 아니라 설명과 조정의 문제로 바뀐다. 하버마스가 말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이런 사소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문제를 개인의 성격이나 능력으로 돌리는 대신, 서로의 전제를 말로 확인할 수 있을 때 일상은 불필요한 오해에서 벗어난다.
이와 유사한 의사소통의 실패는 정치 상황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정부나 정치 지도자가 어떤 정책을 설명할 때, 그 정책이 전제하고 있는 조건이나 수치, 맥락이 시민들에게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설명은 분명히 이루어지지만, 시민들은 그 설명이 무엇을 전제로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내가 경제를 몰라서 그런가”, “정치는 원래 어려운 건가”라고 생각하며 침묵한다.
질문하지 않는 시민과 설명을 반복하는 권력 사이에서 정책은 합리적으로 논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제가 어긋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이때 정치적 합의는 소통의 결과라기보다, 문제 제기가 봉쇄된 결과에 가깝다.
그러나 때로는 한 질문이 정치적 상황을 바꾸기도 한다. “그 수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 정책의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은 정책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정책이 기대고 있는 전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절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들이 질문할 수 있고, 권력이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사소통 구조가 유지될 때 비로소 합리성이 작동한다. 정치에서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왜곡이며, 한 사람의 발화는 개인의 불만이 아니라 공적 이성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