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거의 반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무선호출기는 해지시켰고, 나는 나만의 동굴에 스스로 나를 가뒀다. 엄마와 아버지는 답답한 마음에 애가 탔고, 나는 그간에 했던 내 행동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에 더 마음이 답답했다.
“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낀데? 고마 병원에서 살다 죽을끼가?” 뽀빠이 엄마는 그 무렵 눈물이 많아져서 자주 내 병실에서 울었다.
“엄마...”
“와! 니 이래 답답하게 등신맨치로 살 거면 고마 내랑 같이 죽어뿌자!” 엄마는 계속 울었고, 나도 눈물이 났다.
“엄마... 저번에 신문 보니까 산속에 있는 기숙학원 같은데 있던데, 내 퇴원하고 거기 보내주면 안 되나?” 병원에 누워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니, 정육점 형이 생각이 났다. 공부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던 형의 말이 떠올랐고,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형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거 보내주면 착실히 공부하고 살 수 있겠나?” 엄마는 눈물을 닦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응. 내 열심히 해보께. 근데 아부지랑 둘이서 가게 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거는 걱정 마라.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한다. 니는 언능 낫을 생각이나 해라.”
“고맙데이... 엄마...” 눈물이 자꾸 났다. 그냥 자꾸만 눈물이 났다.
퇴원을 하고, 바로 학원에 등록했다. 학생기록부를 떼오라는 학원 측의 요구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나는 그런 기록이 없어 내 상황을 설명했고, 난색을 표하는 학원 측에 어떠한 사고도 치지 않고 지낼 것이라는 각서와 보증인 둘을 세우고 나서야 겨우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학원 생활은 단조로웠지만 엄격했다. 네 명이 한방을 쓰고, 방마다 방장, 층마다 층장이 있었다. 매일 5시 30분에 기상해서 다 함께 운동장을 뛴 다음에,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밤 9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9시 이후에는 자율학습이란 명목하에 12시까지 각자 공부를 했는데, 이 또한 각 방의 방장과 층장이 감시와 감독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곳에서 나는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감정 없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새벽 5시 30분부터 시작되어 새벽 12시까지 이어지는 언어폭력과 인격 모독은 닫힌 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답답함이 커질 때면 나는 운동장에 나가 미친 듯이 달리기를 했다.
달리기를 할 때면 발바닥에 닿는 운동장의 모래 느낌이 좋았다.
시험을 통과하면 한 달에 한 번 외출이 허락되었다. 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학원에 등록한 재수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학원 시험 수준은 내게 너무 높았고, 학원에 있는 내내 나는 외출을 하지 못하다가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나서야 특별히 외출을 허락받았다. 버스를 타고 시민운동장으로 갔다. 오랜만에 갔지만 낯익은 운동용품점과 식당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뽀빠이 엄마 손을 잡고 간 기억이 있는 운동용품점에 들어갔다.
“단거리용 스파이크 좀 보러 왔는데요.”
“학생은 종목이 뭔데?”
“백 미터요”
“체격이 좋네. 어디 학교 다니노?”
“학교 안 댕기는데요.”
“그럼 어디서 운동하노?”
“그냥 혼자요.”
“혼자 뛰는데 스파이크가 필요하나... 사이즈는?”
“275요.”
“백 미터니까 9mm짜리로 하면 되는데~ 어디 보자.”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켤레의 스파이크를 가지고 왔고 나는 어릴 적 신었던 모델과 같은 신발을 골랐다.
“원래는 60000원 짜린데, 할인해가 48000원만 주고 가라.”
“고맙습니다.” 지갑에서 만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아저씨에게 건네주고 밖으로 나왔다. 신발을 사고 나니 갈 곳이 없었다. 부모님의 가게나 집으로 갈려니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까봐 겁이 났다. 버스를 타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몇 달만에 나가는 외출인데 세 시간만에 복귀하니 사람들은 다들 뭐라뭐라 한 마디씩 했다. 모든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운동장으로 나가 방금 산 스파이크를 신었다.
사박사박 눈길을 걷는 느낌이 들었고, 눈물이 흘렀다.
수능 성적에 맞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전문대 기계과에 지원했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학교를 고를 수 있는 성적도 아니었거니와, 고생하는 부모님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생활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예비소집 등을 모두 건너뛰고, 첫 수업이 있는 날 학교에 처음으로 갔다. 과의 특성상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동기들은 대부분 나를 알고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있는데 뒤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저 앞에 앉은 아 빨갱이 아니가?”
“빨갱이가 누군데?”
“왜 우리 소풍 갔을 때 놀이공원에서 머리 노란 여자아랑 댕긴 아 있다아이가.”
“아 기억난다. 자가 가가?”
“그 후로 형들한테 윽수로 뚜디리 맞고 다른 데로 이사갔다 카던데 다시 왔는갑네.”
“근데 자 학교 짤맀다미 여는 우째 왔노?”
“그건 모르겠노. 궁금하면 니가 가가 물어보든가.”
“미친나. 니가 가라.” 일부러 들으라고 이야기를 하는건지, 내 귀가 밝아 조용히 속닥거리는 이야기들이 들리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강의하는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나에 대한 수군거림만 내 귀에 잘 전달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과대표가 신입생 환영회가 있다고 저녁에 학교 앞 술집으로 모두 모이라고 했다. 수군거림 탓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성인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술에 취한 남자들은 그냥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개였다.
한쪽에선 복학생들이 자신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하며 멍멍 짖고, 한쪽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누가 얼마나 잘나갔느냐를 따지며 멍멍 짖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음담패설을 하며 멍멍 짖었다. 술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빨리 개들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런 나의 태도가 개들의 공격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김호석이 니가 그래 유명하다메?” 모두가 내겐 낯선 이들이어서 선배인지 동기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반말로 물어오는 질문에 존댓말로 대답해야 할지, 반말로 대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와 이 새끼 봐라. 선배가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뭐가 유명한지 모르겠는데요.” 스스로가 선배라고 밝혀, 선배인 줄 알고 나는 대답했다.
“니 이 동네에서 윽수로 날맀다 카던데. 저 니 동기들이 아까 다 얘기했으. 캐가 그 새끈한 애인이랑은 잘 지내고?” 갑작스런 미정이에 대한 이야기에 애써 잊고 지낸 기억들이 스믈스믈 올라왔고, 심장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이켰다. 술은 참 썼고, 그 쓴맛만큼이나 내 속도 참 씁쓸했다.
“이 새끼 벙어리가. 와 대답을 안하노. 캐가 잘 지내나 안 지내나?” 술에 취해 큰 목소리로 집요하게 묻는 선배의 말에 술집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였고, 나는 대답 대신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을 들어 잔에 따르고 다시 한 잔을 마셨다. 여전히 썼다.
내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욕을 하기 시작했고, 흥미로우면서도 혹시나 어떤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내 동기들은 담배를 권하며 선배를 가게 밖으로 데려갔다. 나는 소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던 나는 금세 얼굴이 빨개졌고, 곧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것처럼 땅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을 쐬면 좀 나을까 싶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공기를 내뿜던 가게를 나와 찬바람이 코를 타고 폐로 들어오자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던 내 기대와는 달리 세상이 온통 뱅그르르 돌기 시작했고, 세상이 도는 회전수만큼 내 속도 뒤집혀 가게 앞에 속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을 개어내기 시작했다. 개어 내는 동안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도, 속에 들어있던 모든 덩어리가 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과 사무실에 가서 휴학 신청을 했고, 특별한 사유 없이 1학년 1학기에는 휴학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무청에 가서 합격만 한다면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군대가 해병대라는 이야기에 주저 없이 입대 지원서를 썼다. 군대는 지원만 하면 다 받아주는 곳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런저런 절차가 있었다. 입대를 위한 면접을 보면서 면접관은 중, 고등학교를 겪어보지 않은 내가 조직을 최우선으로 하는 단체문화에 적합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보고 싶다고, 그걸 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고 면접관을 설득했다. 면접관은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나를 합격시켰다.
그 면접관의 말은 맞았다.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훈련소 문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날아오는 교관들의 무자비한 욕지거리는 입대 30분만에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친구가 없이 자란 나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전우애라던가, 동기애를 이해할 수 없었고, 체력은 자신 있었기에, 누구보다 빨리, 교관들이 시키는 걸 해내기 위해 다른 동기들을 짓밟았다.
훈련을 마치고, 실무부대에 가서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수직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계급문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욕을 먹는 일이 반복되었고, 나로 인해, 나의 근접기수들은 매일같이 선임들의 얼차려와 매타작을 받아야만 했다. 맞을 때는 아팠지만, 어느 시간이 흐르니 1990년처럼 맞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했던 시간에 그들의 구타가 없는 시간이 더 긴장되고 두려워졌다. 그리고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를 때릴 수 있는 사람보다, 내가 때릴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고, 나는 그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