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now falling faintly through the universe and faintly falling, like the descent of their last end, upon all the living and the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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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을 보고선 예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종종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주제와, 틸다 스윈튼의 아우라, 미장센의 조화가 완벽해 보였기 때문이다. 상영관이 몇 없어 일정 없는 토요일 댓바람에 나가 보고 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종군기자 마사가 작가인 친구 잉그리드의 도움을 받아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이야기.
영화에는 그야말로 미학적인 요소들이 가득했지만, 정작 영화 자체는 내게 숭고적 사건을 만들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심원한 통찰이나 새로운 시각이랄 게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가 다루는 죽음이 여전히 코드화된 죽음의 이미지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웠다.
죽음이란 현실적이지 않은 동시에 낭만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깥이고, 초월이기 때문이다. 마사는 죽음 이후에도 딸 미셸과, 친구 잉그리드의 기억과 글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겠지만, 그 존재란 산 자들의 것이지 더이상 죽은 마사의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죽은 이에게 삶의 불가능성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존재의 위협이다. 그래서 죽음은 공포이다.
<룸 넥스트 도어>는 우리 삶에 은폐되어 있는 죽음을 건져내 색깔을 입히지만 이는 단지 삶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기 위함일 뿐이다. 죽음은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듯 하지만 마사의 페이드아웃과 함께 색체 너머의 세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잉그리드는 반복해서 마사의 입을 막음으로써 불쾌하고 음침한 죽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는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을 낭만적이고, 부르주아적이고, 예술적인 것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마사의 품위있는 마지막을 위해 동원된 우정과, 부와, 자유와, 테라스와, 멋이 과연 존엄의 필수조건이라면, 영화는 우리의 미래에 도래할 요양원 죽음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을 남은 자, 아직은 죽음과 관계 없는 산 자의 시선으로만 바라본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적 '쾌'에 도달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존엄이란 호퍼의 그림이 달린 대저택에 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존엄은 모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주체적인 결정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해 아래 삶이란 언제나 상호주관적인 것이다. 태어남이 그렇듯 죽음의 순간에도 사람은 혼자인 동시에 함께인 것. 모든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므로 고독과 세계가 별개가 아니듯 존엄한 죽음과 굴욕적인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내리는 눈에는 색깔이 없다. 다만 '온 우주를 지나 아스라히' 그리고 공평히 내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