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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이 명화스러운 Jul 28. 2021

타인이 불편한 '나'라는 사람..

어른이 되어 버린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아이 이야기

기억하는 시간만큼 더듬어보면 나는 늘..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불안하고 불편했다.


내가 어려서 가장 많이 듣던 말 중 하나는 '너는 참 조용하구나' 라는 말이었다.

나는 내가 조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모두들 나는 '조용한 아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조용한 아이라는 대명사가 된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불편했으니, 말하지 않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대체 조용하지 않은 다른 아이들은 얼마정도의 말을 하고 사는지 어린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딱히 그렇게 살 수 없으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착한 아이에게 이 아이는 착하다고 앞에서 너무 얘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너무 조용한 아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 그러고 싶지 않아도 나는 착한 아이라는 강요와 압박을 은연 중에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반항을 하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닌 다른 생각을 하는데, 행동을 은연 중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말하는 것들은 아이에게 틀을 만들어 가두는 격이 되고, 아이는 그 틀 안에 갇히는 것 같이 느낀다. 


어쩌면 한 사람을 정의하면서 '이 아이는 이러하다'고 가장 큰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늘 가족이다.


그 아이에게 그런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닐텐데도, 부모는 그 아이의 단면을 그 아이로 정의내려 버린다.

그 아이는 그 부모들이 말하는 나의 틀에 갇히는게 싫지만, 또 그렇게 행동은 정의내려진데로 향하게 된다. 부모님의 기대를 져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참 조용한 아이'라는 딱지같이 정의내려진 편견은, 언제부턴가 내가 되어 있었다.


분명,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조용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에게 너는 조용한 아이라고 말해서 일깨워줄 필요는 없다. 내가 남들보다 조용한지를 모른체 였다면, 언젠가 나는 조금 더 말을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 조용하던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벌써 40대이고, 사회생활을 20년넘게 하고 있다.

그 조용한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모두가 바라는 반전도 없이 나는 여전히 '조용한 어른'이다. 




내가 처음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가 생각이 난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20년쯤 전인가 보다. 그 전만해도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냥 타인과 대화하는게 불안했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방송에서 하는 행동을 설명하며 그 행동들이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유레카'를 외치고 싶었다.


지금껏 내가 낯선 어른 남자와 얘기하는 것이 극도로 불안하고 불편하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내 성격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는 불편한 것이었고, 그건 마음의 병 같은 것이라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안도했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조금 위로도 받았다.


그 방송에서 어떤 아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것이 내가 타인과의 대화를 회피한다는 것을 누가 알아준 것도, 나를 진단해준 것도 아니었고, 누가 알아준 건 더더욱 아니었지만, 나는 내 내성적인 성격으로 내가 평생 대화를 힘들어하는게 아니라는 걸 누군가 얘기해주고 나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에 크게 위로받았고 이해받는 것 같아 좋았다. 

요즘은 티비에 유명하신 오은영 박사님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이들을 진단해주기도 하시지만, 내가 어린 그때만 해도, 그런건 사치스러울만치 말도 안되는 어리광이나 나약함으로 치부당했던 때였다.


나처럼 조용하고 내성적이면, 어디 아픈 사람이나 모자란 사람정도로 취급 받기도 했었으니, 그런 심리적 병이 의학적으로 정의되어 있다는 것이 나를 위로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단어를 잊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말이겠지만, 나에겐 내 마음을 처음으로 누군가가 알아서 인정해주는 단어였다.


어른 남자만 보면, 불편하고 불안해서 말을 잘 하지 않던 여자아이. 물론, 다른 낯선 사람들에게도 말은 잘 하지 않았고, 낯선 것들을 무서워하던 아이는 지금 어른이 되었다.


앞으로 이 매거진에서는 '선택적 함구증'으로 살아가던 아이와 어른이 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의료진도 전문가도 아니니 진단이나 의미들에 대해서 얘기하진 못할 것이다. 다만, 내가 느낀 것들, 나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지금 타인과 말하는게 두려운 아이나 나처럼 어른이 된 분들께 조금의 공감이나 위로, 혹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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