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hni Aug 04. 2024

담장 너머의 세계

<존 오브 인터레스트>

 지난 번 글을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필자가 책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인상깊게 본 영화 한 편을 소개했다.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그랑프리,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국제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한 화제의 영화이다. 독립영화이면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관람한 영화이기도 한데, 이번에서 그 영화를 좀 더 심도있게 이야기해 보자.


 어떤 영화는 휘발성이 강해서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내용을 잊어버리지만, 어떤 영화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영화의 의미를 두고두고 곱씹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후자의 영화가 좋은 영화의 반열에 오르는 것 아닐까? 그런 면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영화다.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영화에는 그다지 복잡한 스토리는 없다. 다만, 독일장교 루돌프 회스의 가정이 나온다. 영화는 이 가족이 한가로이 자연 속에서 소풍을 즐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다음 날 학교에 가고, 아내는 갓난 아기와 함께 정원을 가꾸며 평범한 나날을 살아간다.

 문제는 이 장교의 집 옆이 바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사실이다.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유대인들이 학살 당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독일 장교 가족의 평온한 일상 가운데 들려오는 총소리나 비명소리 등은 보는 내내 관객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이들의 관심 영역(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은 바로 집 안에만 머물러 있다. 영화를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로 이들은 자신들의 집 밖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신경으로 일관한다. 일례로 유대인들의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을 새로 건축하는 일로 루돌프 회스와 기술자들이 차를 마시며 상의하는 장면에도, 그들이 사람을 학살하고 불에 태운다는 죄책감의 표정은 없다. 그냥 일상의 업무를 상의하는 정도의 무표정한 얼굴과 말투로 소각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장교의 아내 헤트비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유대인 포로들이 남긴 옷가지를 집으로 가져와서 하인들에게 나눠주고 자기는 가장 값비싼 모피코트를 챙긴다. 그 옷을 입었던 주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거울 앞에서 모피 코트를 입고 한 바퀴 돌아본다. 


 이렇게 부부와 자녀들은 유대인들이 학살 당하는 지옥의 한 가운데서 천국과도 같은 생활을 영위한다. 아내는 자신이 가꾼 정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장교가 다른 곳으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화를 내면서 자신은 이곳에 남을거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소리, 총소리에 시체를 태우는 연기 냄새도 있을 그곳에서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한 가지 인상적인 장면은 장교가 아이들과 함께 강에서 물놀이를 할 때의 장면이다. 장교는 강 속에서 우연히 무언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아이들을 강에서 빨리 나오라고 명령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의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긴다. 아마도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재를 강으로 흘려보냈고, 장교는 시체의 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이들이 ‘죽음’에 닿았을까봐 그렇게 호들갑을 떤 것이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필자는 생각해 본다. 과연 이들이 처음부터 이랬을까. 아우슈비츠라는 학살의 장소에 처음 와서도 저렇게 무신경하게 선을 긋고 살았을까. 내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러한 죽음들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다가 결국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영화감독 조나단 글래이저는 그것이 2차 대전 때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투, 우크라이나 전쟁도 현재진행형인 고통이지만 우리가 그냥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말고 우리의 삶도 한 번 돌아보자. 내가 생각하는 관심 영역은 너무나 좁게 한정되어 있지는 않나? 예수님은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너무나 개인적인 영역에만 매어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복을 받고 잘 되는 일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재 우리의 관심영역이 너무나 좁고 좁음을, 그래서 담벼락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메세지를 이 영화는 던지고 있다. 물론 안쪽의 정원은 평화롭고 거기에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달콤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개인적인 안락과 즐거움에 빠져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는 보고 나서 오히려 고민거리가 많아지는 영화라고 한 것이다.

 

 영화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그건 어떤 소녀가 한밤중에 몰래 수용소 쪽으로 나와서 곳곳에 사과를 숨겨 놓는 장면이다. 그것은 실존 인물인 폴란드 소녀 알렉산드라를 모델로 했고 그녀가 포로들을 위해 곳곳에 사과를 놓는 것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독 이 장면은 실제 장면이 아니라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어둠 속에서 소녀만 하얗게 빛나게 표현되고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장면은 자신만의 영역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이웃들을 향한 행동을 보인 소녀를 칭찬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모습을 한 그녀를 보면서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한 사람이 생각났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다니엘 12장 3절).


 영화의 마지막. 독일 장교 회스는 건물 계단을 내려가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헛구역질을 몇 번 한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자신만의 평안함을 위해 살았던 삶이 결국은 구토를 일으킬 정도의 헛된 삶이었다는 의미 아닐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도서 7장 1,2절).

 우리도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보다 끝날을 항상 마음에 두며 이웃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는 12세 이상 관람가이니 가능한 분은 한 번 관람을 하고 나름의 의미를 찾아보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하늘에 시선을 두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