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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미아 Oct 06. 2019

열여덟 살의 엄마, 그리고 시어머니

엄마와 엄마의 시어머니 이야기



엄마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의 친엄마, 즉 외할머니가 아닌 아빠의 친엄마를 엄마라고 부른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좀 복잡 미묘하다. 할머니는 엄마를 싫어했고, 엄마도 할머니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 웰컴 투 시월드라고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수많은 며느리들의 경험담들을 우리 엄마도 고스란히 경험했던 터라 나는 엄마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목격한 날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엄마는 열여덟 살에 아빠와 결혼했다. 아빠가 스물여섯, 엄마가 열여덟 살이었다. 두 사람은 선을 봐서 결혼을 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 거기에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있는 집에 시집올 여자는 없었기 때문에 아빠는 그 나이가 되도록 선자리가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그렇게 그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집으로 시집을 온 엄마는 어릴 때 보약을 잘 못 먹어 귀가 들리지 않았었다. 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말도 어눌할 수밖에 없었다. 즉, 엄마도 누구나가 환영하는 며느리의 조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이들은 엄마의 큰 오빠, 즉 외삼촌과 함께 사북탄광에서 일하던 아빠의 외사촌 형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안타까운 마음으로 듣지 못하는 막내 동생과 찢어지게 가난한 외갓집의 노총각 장손을 만나게 해 준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솔직히 아빠의 이십 대 사진을 보면 잘생기긴 했었다. 아빠도 순수하고 귀여웠던 엄마가 맘에 들었으리라. 


그렇게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했다. 그러나 엄마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당연히 우리 할머니였다. 당시 엄마는 귀는 들리지 않았지만 외갓집에서 막내딸로 집안일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귀여움을 받고 자랐더랬다. 엄마는 결혼을 하자마자 엄청난 양의 집안일을 맞닥 드렸고, 당연히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곱게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를 쥐 잡듯이 잡았더랬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더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던 지라 큰소리를 바락 바락 지르는 할머니의 말은 어렴풋이 알아들었던 엄마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점점 움추러 들었다. 물론 이럴 때 아빠가 짠! 하고 나타나서 엄마 편을 들어주었어야 했는데 아빠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소리 지르고 무시하고 욕하는 할머니 앞에서 턱 하니 팔짱을 끼고 같이 대거리를 했을 것이다. ‘열여덟 살에 뭘 그렇게 알아야 하냐고. 나는 우리 집에서 그런 대우받고 크지 않았노라고, 모르면 가르쳐주면 될 것 아니냐고’ 같이 소리를 바락 바락 질렀을 것이다. 당연히 엄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잘 듣지 못한다는 핸디캡 때문에 더욱 속으로만 삼켜냈었다. 그 모든 수모를.


하루는 할머니가 단단히 화가 나서 엄마 손목을 잡고 엄마를 소개해준 그 외사촌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집 마당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 이런 병신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왔어! 이 병신은 다시 그 집에 갖다 줘!” 엄마는 너무 놀라 울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엄마는 그때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았을까? 왜 뱃속에 있는 나와 함께 외갓집으로 가지 않았을까? 


내가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바빴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항상 할머니 품에서 잠들고,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으며 할머니에게 그날 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보다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는 할머니와 함께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그래서 훗날 엄마와 할머니가 싸울 때면 나는 엄마에게 항상 이야기했다. “엄마, 할머니에게 너무 심하게 그러지 마. 왜 그래? 할머니한테 좀 상냥하게 대해줘” 그럼 엄마는 기가 찬 듯이 대꾸했다. “니가 뭘 알아?” 그랬다. 나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던 그 잔인한 짓 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엄마를 다시 데려다주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할머니를 증오하게 되었다. 아무리 할머니가 나를 키워주었대도 나는 할머니를 그 전과 같은 얼굴로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고모들과 있을 때면 항상 엄마 욕을 했다. 고모들이 오면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 옆에 자리하고 앉아 고모들이 사 온 과자를 먹으며 한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들 둘러앉아있으면 할머니, 고모들 모두 엄마 욕을 했다. 나는 과자에 정신이 팔려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가끔씩 그 자리에 있는 내가 신경이 쓰이면 나를 부르며 말했다. “너는 입이 무거워서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니 엄마한테 일러주지 않지?” 그러면 나는 과자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다시는 과자를 사오지도 않을 것이고, 나에게 과자를 주는 대신 동생들에게 다 줄 것 같았기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신다. 처음 치매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할머니 때문에 우울증이 왔었다. 치매 환자를 집에서 돌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엄마가 할머니를 ‘어머님’이 아닌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때 즈음이었다. 치매에는 여러 성향이 있지만 우리 할머니가 앓고 있는 치매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 불이 날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배변 실수는 잦았다. 엄마의 자식들인 우리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 동네에서는 그 누구도 요양병원에 간 일이 없었다. 즉, 치매 환자이지만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고려장’과 비슷한 결정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우리는 엄마가 너무 딱했지만, 부모님의 선택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비겁하지만 그랬다. 그들이 선택한 그들의 인생이라며 나는 나의 비겁함을 포장했었다.  결국 엄마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아빠에게 울면서 호소를 했다. 결국, 아빠는 아빠 형제들과 몇 번의 언쟁을 벌였고 할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할머니를 그토록 요양병원에 보내고 싶어 했던 엄마는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던 날 하루 종일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고생을 하고도 왜 그렇게 울었을까. 엄마는 말했다. “옛날 일만 생각하면 얼굴도 보기 싫지만 노인네가 참 불쌍하다”라고. 미안하지는 않지만 불쌍하고 안쓰럽다고. 그래서 엄마는 할머니를 어머님이 아닌 엄마로 부르기 시작한 걸까? 모르겠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가시고 난 이후, 우리 집은 여느 때보다 평화롭다. 할머니를 집에서 보살 필적엔 엄마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댔고, 그들의 싸움에 우리도 하루가 멀다 하고 피곤해했었다. 이제 엄마는 예전보다 자주 웃고, 각 방을 쓰던 아빠와도 매일 같이 잠을 잔다. 내가 이제 동생 하나 더 만들면 되겠다고 농을 하자 엄마는 “늦었어. 공장 문 닫은 지 오래다”라고 같이 농담을 한다. 


열여덟 살의 엄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내 편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런 엄마에게 왜 그냥 살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다 버리고 가버리지 왜 그냥 살았냐고. 우리 때문에 그냥 참고 살았다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가 외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아빠 얼굴도 모르는 채로 살아왔는데, 결혼 후 엄마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뒤늦게 아빠의 정을 알게 된 것이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아버지를 ‘아버님’이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엄마에게 거금을 들여 보청기를 맞춰준 것도 할아버지였고, 엄마 생일이면 미역국을 끓이라고 한 것도 할아버지였고, 읍내 빵집에 나가서 케이크를 사다 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할머니가 엄마를 잡으면, 그 할머니를 잡은 것도 할아버지였고, 모여서 엄마 욕을 하는 고모들을 혼내 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후처를 들이라는 말 같지 않은 말을 막아 준 것도 할아버지였고, 아빠와 엄마가 싸우면 엄마 편을 들어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고모들은 나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네 다 키워준 거 알지? 너네는 할머니한테 잘해야 해” 

미안하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본인의 부모에겐 본인들이 잘해야지. 나는 내 부모에게만 잘할 테다. 






덧붙이자면, 나는 아직도 할머니 요양병원을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 열여덟 살의 엄마 손목을 잡고, 외사촌 집 마당에서 병신을 가져가라고 했다던 할머니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할머니 병원에 가서 인사 좀 하라고, 할머니 얼굴 좀 보고 가라고 하는데 나는 갈 수가 없다.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린 일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마당에서 죄지은 표정으로 서있었을 엄마가 너무 가여워서 할머니를 마주할 수가 없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미안하진 않지만 안쓰럽다고 했고, 나는 할머니가 안쓰럽진 않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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