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90대 노부부의 제주 한 달 살기 로망

by 이다

"애미야, 우리 두 늙은이 제주도에서 한 달만 살게 해 다오."


"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두 늙은이 제주에서 한 달만 살고 싶구나. 죽기 전 소원이다."


이 말을 들은 날 이후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다. 어머니께는 차마 내색하지 못했지만 제주도라니.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한다는 그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시겠다는 건가.


평소엔 내게 까다롭게 구시기는커녕 막내며느리라고 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살갑게 대해 주시는 어머님이다. 그런 어머님이 내게 하신 최초의 요구, 제주도 한 달 살기.


전화를 받은 날부터 잠이 안 온다. 아버님은 올해 만 나이를 적용해도 93세, 어머님은 91세의 초초노인이다.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얼떨결에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초초노인 두 분이 제주도에 가서 살고 싶으시다는 말이다.




그래,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이란 걸 해보자. 제주도 좋지. 나도 두어 번 가봤지만 갈 때마다 좋았다. 육지에서 볼 수 있는 바다와는 때깔부터 다른 것이 제주바다 아닌가. 동해의 검푸른 바다색과는 완연히 다른 수채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에메랄드 바다빛깔. 티비 채널만 돌려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곳이 제주다 보니 이젠 제주 어디 어디 핫플레이스는 눈에 선할 지경이다.


언젠가 효리네 민박집을 한창 재미있게 봤는데, 나도 모르게 아, 저기가 내 집이었으면, 요가를 하고 책을 읽으며 꾸벅꾸벅 졸던 마당이 내 마당이었으면, 저 순실이가 뛰어노는 드넓은 땅이 내 땅이었으면. 하고 꿈결에도 바라게 되더라. 심지어 그 좋아하던 커피도 끊고 보이차를 마시며 새벽 기상까지 했던 나 아니던가.


나를 포함, 온 국민의 로망이 되었다 해도, 그래 로망은 로망이지, 내가 무슨 제주도에 가서 살 수 있겠어, 로망은 로망일 때 좋은 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째 요즘은 한 달 정도는 제주도에 살아 봐야 하지 않겠어.로 바뀌는 분위기다.


유튜브를 터치하자 내 고민을 어떻게 알았는지 제주 동영상이 나온다. 고민을 해결해 보려 정처 없이 들어왔지만 철썩 대는 파도를 보니 몇 분간은 꼼짝없이 제주에 가있는 느낌.


내친김에 아래로 스크롤을 내려보니 음,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이른 여름인데도 제주 한 달 살기에 들어갔다는 동영상을 올려놓았다. 아차차.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이건 그냥 내 로망일 뿐이다. 말 그대로 로망 말이다.


어머님은 무릎수술로 거동이 불편하시고 아버님은 풍채는 건장하셔도 보청기 없이는 안 들리신다. 70,80 대에도 잘 지내시던 분들이 갑자기 90이 훌쩍 넘어 제주 한 달 살기를 하시겠다. 복잡하다 복잡해.


안될 건 또 뭐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늦은 밤,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얘기를 꺼냈다. 남편도 슬쩍 놀래는 눈치다. 비용은 그렇다 치고 부모님 연세가 90대라는 게 가장 걸린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지. 아버님이야 낚시를 좋아하시니까 바닷가 낚시를 하신다 쳐도 거동이 불편한 어머님은 어떻게 지내실지. 그렇다면 그게 과연 제주 한 달 살기나 된단 말인가. 모름지기 한 달 살기 정도면 하루 종일 바닷가에도 있어 보고 핫플레이스도 좀 다니고, 사려니 숲이 그렇게 좋다던데 숨차게 걸어보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다 보니 사실 이건 몽땅 내 로망이다.


그분들이 바라는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어떤 모습일까. 분명 내가 생각하는 이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시길래 제주에 가시려는 걸까. 궁금하다 궁금해. 90대인 두 분의 속 마음을 반절도 살아보지 못한 내가 상상하는 건 무리다. 무리.


"여보, 우리 보내 드리자. 비용이 좀 들어도, 그냥 보내 드리자.. 멀리 가시는 것도 아니고 제주에 가시는 거잖아.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데 살아 계신 분들 소원이잖아. 다른 거 생각하지 말자. 두 분은 어른이야. 그냥 두 분을 믿자고."


맞다. 두 분은 어른이다. 어른을 뛰어넘는 어른이지. 그런데 왜 난 두 분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들처럼 보이냔 말이다.


"여보, 어머님, 아버님 두 분만 가시는 건 어쩐지 마음이 안 놓여. 내가 따라갈까? 아니 모시고 갈까? 괜찮겠어 여보?"


"....."


"말 좀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