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거기에 네가 있었다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by 새벽뜰


어떤 시인이었지. 순이를 사랑하던 그날부터 거리에 수만 명의 순이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썼던 사람이.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中>


난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던 거라고 생각한다.

인적이 드물던 대형마트였다. 일하던 학원 근처라 평소엔 그곳에 갈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어림짐작으로 4층, 5층 정도까지 있는 쇼핑몰이었다.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나는 소소하게 사야 할 생활용품들이 많았다. 커다란 베갯잇, 침대 위 머리맡에 올려둘 조명과 연습장 정도였나 개수는 많지도 않았다. 장바구니를 들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으며 모퉁이를 돌던 순간, 슥-내 뒤로 걸어오던 너를 내가 얼마나 놀란 마음으로 봤었는지 너는 알고 있었을까. 짙게 워싱된 청바지, 검은색 폴로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자는 정말 내가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는 , 너였다.

적어도 내 눈에 들어온 계산대는 모두 비어 있었고 어느 쪽을 가더라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넌 나와 같은 계산대로 와 줄을 섰다. 덤덤한 척하려고 애꿎은 지갑만 만지작댔던 나를 너는 알고 있었을까.

아주 오묘한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계산하시는 분이 내 배 겟 있을 빼먹고 계산하지 않은 걸 알았고 나는 화면을 가리키며 "이거 계산 안 하신 것 같은데요?" 했다. 겸연쩍게 웃으시던 그분은 감사하다며 나를 보고 웃었다. 같이 웃었던 건 자동반사 적으로 나온 반응이었지만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던 너를 향해 한번쯤 웃어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도, 행여 눈이 마주친다면 쓸데없이 새침한 척할 내 모습이 상상됐고 얼마나 꼴 보기 싫을지 알 것 같아 부지런히 참았던 거다. 너의 행방과 종착지는 오랫동안 나에게 궁금함으로 남았지만 그 이후로도 많은 인연을 맺어올 수 있었던 너와 나를 생각한다면, 우린 제법 인연이었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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