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명의 무당이 살았던 마을
지금 백무동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천왕봉 등반이 목적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때 백 명의 무당이 살았다는 전설이 새겨진 땅이 펼쳐져 있다.
백무동(白武洞). 이 평범해 보이는 지명 속에는 은밀한 비밀이 숨어 있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백무동(白巫洞)이었다. 白巫, 즉 '백 명의 무당'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곳에 백 명의 무당이 살았을까? 그들은 어디서 와서, 왜 이 깊은 산골에 모여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답은 천왕봉 바람이 속삭여주는 이야기 속에 있다. 지리산 깊은 곳에서 벌어진, 신과 인간 사이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에.
아주 오래전, 불도를 닦기 위해 지리산에 든 한 승려가 있었다. 법우(法雨)라는 이름의 스님이었다. 그는 깊은 동굴을 찾아 들어가 좌선 수도에 정진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오직 불도에만 마음을 두었다.
속세의 모든 유혹을 끊고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따르려 했던 청정한 수행승.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의 도심을 흔들 수 없으리라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을 마치고 동굴 밖으로 나온 법우스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바로 지리산을 지키는 산신, 천황할머니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고할미, 지리산 성모라고도 불렀다.
천황할머니는 때로는 늙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때로는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날 법우스님 앞에 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천황할머니는 오랫동안 법우스님의 수행을 지켜보았다. 그의 순수한 마음과 굳은 의지에 감동했고, 어느새 사랑에 빠져 있었다.
여름 어느 저녁, 천황할머니는 얇은 모시옷을 입고 천왕봉 성모사를 찾았다. 마침 비가 내려 옷이 흠뻑 젖은 그녀는 하룻밤 머물게 해달라고 청했다.
법우스님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성모 사는 단칸방뿐이었고, 여인을 들이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바람 치는 밤에 여인을 내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법우스님은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천황할머니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하고 말았다. 불가에서 나온 그는 속세의 사람이 되어 천황할머니와 백무동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천황할머니와 법우스님 사이에는 여덟 명의 딸이 태어났다. 이 딸들은 모두 특별한 영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황할머니는 딸들을 무당으로 만들어 전국 팔도 각지로 보냈다.
딸들은 각자 맡은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무당이 되었다. 그중 셋째 딸은 벽소령을 넘어 청학동 삼신봉을 거쳐 하동에 정착했다. 이로써 전국 각지에 무당이 퍼지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우리나라 무속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팔도에 흩어진 무당들은 1년에 한 번씩 백무동에 모여들었다. 어머니인 천황할머니께 안부를 전하고,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며 큰 굿을 벌였다.
이때 백무동에는 정말 백 명이 넘는 무당들이 모여들었다. 온 산이 굿소리와 무가로 가득 찼고, 사방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것이 백무동이라는 이름의 진짜 유래였다.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가 되면서 유교 문화가 뿌리내렸다. 무속은 미신으로 여겨졌고, 백무동(白巫洞)이라는 이름도 부담스러워졌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巫(무당 무) 자를 武(무예 무) 자로 바꿔 불렀다.
하지만 땅이 기억하는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백무동 어르신들은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한다. 깊은 밤 산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안갯속에서 흔들리는 하얀 그림자들...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은 모른 채 지나가지만, 이곳은 여전히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 땅이다. 천황할머니와 법우스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무속의 성지, 백무동.
그 이름 속에 숨겨진 비밀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단순한 등산로 입구가 아니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뿌리가 시작된, 신비롭고 신성한 땅인 것이다.
자가용 이용 시:
경부고속도로 → 대전통영고속도로 → 88 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 IC 또는 함양 IC에서 나와서 마천 방면으로 약 30분
총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
대중교통 이용 시:
고속버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 함양터미널 (약 4시간)
시외버스: 함양터미널 → 마천행 버스 → 백무동 하차 (약 40분)
새벽 산행을 위한 팁:
전날 함양이나 마천에서 1박 후 이른 아침 백무동으로 이동
백무동 주차장은 새벽 4-5시부터 등산객들로 붐비니 미리 도착 권장
백무동을 찾아가는 길, 단순히 산을 오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천황할머니와 법우스님의 전설이 깃든 이 땅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밟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