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기억록 4화

엄마의 자장가

by 루담

엄마의 자장가

1. 비 오는 날의 방문객

가을비가 하얗게 핀 메밀꽃밭을 적시고 있었다.
카페 메밀향기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또각또각 울리며, 마치 잔잔한 자장가처럼 흐르고 있었다.

"서연 씨, 손님 오셨어요."
준호의 부름에 고개를 든 서연은, 빗속에서 우산을 접으며 들어오는 젊은 여성을 보았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 이은지였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과 깊은 눈매 속에 오래된 고민이 드리워져 있었다.

2. 입양아의 이야기

"저는… 입양아예요."
은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배어 있었다.

"아기 때 좋은 부모님께 입양돼서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양부모님은 저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셨죠."
그녀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나니… 친엄마가 자꾸 생각나요. 왜 저를 버렸는지, 어떤 분이었는지."
은지의 눈가가 젖었다.
"특히 꿈에서 자장가가 들려요. 누군가 저를 안고 노래를 불러주는데… 깨면 기억이 안 나요."

3. 유일한 단서

은지는 가방에서 낡은 담요 하나를 꺼냈다.
하늘색 체크무늬 담요. 모서리 한쪽에는 서툴지만 정성스러운 자수로 ‘은지’라는 이름이 놓여 있었다.

"발견됐을 때 저를 감싸고 있던 거라 해요. 스무 살 때 양어머니께서 주셨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요. 왜 버렸을까 원망하다가도, 사실은 더 알고 싶어요."

서연은 담요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기억이 남아있을 수도 있어요. 함께 확인해봅시다."

4. 메밀꽃밭으로

그날 밤, 비가 그치고 달빛이 메밀밭을 은은히 비추었다.
서연은 은지를 데리고 메밀꽃 사이에 섰다.

"이 담요를 통해 어머니의 기억에 닿을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시도해봅시다."

두 사람은 함께 담요를 쥐고, 꽃잎을 만졌다.
순간, 꽃들이 연분홍빛으로 물들며 파도처럼 흔들렸다.

휘잉—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다.

5. 25년 전의 진실

작은 병실. 창밖으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스무 살의 젊은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은지야… 엄마가 미안해."

현재의 은지는 숨을 멈췄다. 아기의 얼굴, 엄마의 얼굴… 그 눈매가 자신과 똑같았다.

"엄마가 널 키울 수 없어. 아니, 키우면 안 돼."
엄마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6. 엄마의 사정

기억 속 엄마는 대학생이었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홀로 출산을 감당해야 했다.
"내가 널 데리고 있으면 우리 둘 다 굶어 죽을 거야."
그녀는 자책하면서도 아기를 놓지 못했다.

"복지시설에 맡기면 좋은 사람들이 너를 키워줄 거야. 엄마보다 훨씬 잘."

7. 마지막 밤

퇴원 전날 밤, 엄마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눈물이 떨어져 아기의 이마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담요 모서리에 ‘은지’라는 이름을 수놓으며 말했다.
"이 이름이라도 꼭 기억해줘. 엄마가 널 사랑했다는 증거야."

8. 복지시설 앞에서

다음 날, 엄마는 아기를 담요로 꼭 싸고, 쪽지 한 장을 남겼다.

‘이 아이 이름은 은지입니다. 부디 좋은 분께 입양되어 행복하길… 못난 엄마가.’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자, 엄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눈물을 삼키고 돌아서야만 했다.
"안녕, 내 딸아… 행복해."

9. 그 후의 삶

기억은 빠르게 흘렀다.
엄마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
매년 은지의 생일이면 홀로 미역국을 끓이며 눈물로 하루를 채웠다.

"은지야, 엄마는 널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어디선가 행복하기를."

10. 현실로의 복귀

메밀밭. 담요를 꼭 쥔 은지는 오열했다.
"엄마… 저를 버린 게 아니었어요. 살리려고 하신 거였어요."

서연이 은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네, 정말 많이 사랑하셨어요."

11. 25년 만의 재회

한 달 뒤, 수소문 끝에 엄마의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의 작은 식당.
"어서 오세요."
환하게 웃던 중년 여인은, 눈앞의 은지를 보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혹시… 이름이?"
"은지예요. 이은지."

여성의 눈물이 쏟아졌다.
"내 딸… 은지야!"

둘은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25년의 세월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12. 두 엄마의 만남

며칠 후,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함께 만났다.
"제 딸을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생명을 주신 분은 당신이세요. 제가 감사해요."

두 여인의 손이 맞닿았다. 눈물 속에서 은지는 미소 지었다.
자신의 삶이 두 엄마의 사랑으로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13. 에필로그 – 자장가의 완성

결혼식 날, 은지는 두 엄마의 손을 번갈아 잡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엄마, 제 아이가 태어나면… 자장가를 불러주세요."

친어머니는 흐르는 눈물 속에 노래를 이어갔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이번에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담긴 자장가였다.
메밀꽃밭의 꽃들이 연분홍빛으로 물들며 흔들렸다.
마치 모성의 기적을 축복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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