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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Jan 11. 2023

나의 여신님, 합격의 조건

[나의 사람들] 수희 언니

<*호주나라>라는 사이트에서 채용공고를 보다가 시드니의 한 무역회사에서 입사지원을 했는데 합격했다는 것이다. (*호주나라: 호주의 한인 종합 포털 사이트) 특이하게도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도 지원자격에 해당되서 별 기대 없이 지원해 봤다고 했다. 그리고 서류 합격 및 면접 제안 연락을 그날 받은 것이었다.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 학생비자 소지자, 영주권 또는 시민권자. 나의 나라를 떠나면, 그곳에서는 비자가 곧 신분이 다. 비자의 종류가 계급을 뜻하는 건 아닌데 하게도 그런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인 언니가 아르바이트가 아닌, 시급을 받는 일이 아닌, 무역회사에 합격을 하다니! 합격했다는 언니의 말에 축하를 해주기도 전에 이 상상도 못한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거리감이 막연한 느낌에서 그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렇지만 언니가 잘되길 진심으로 바란 것도 사실이다.


첫 면접이 있었던 날 저녁은 언니가 시무룩해 있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언니는 늦은 시간까지 우리집에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고, 떨어진 거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기대 없이 이력서를 제출하고, 기대에 부풀어 1차 면접을 보고 와 보니 생각보다 회사가 너무 커서 자기 실력으론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차라리 규모가 작은 회사이길 바랬고, 호주나라 사이트에 올라온 채용공고이니 또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 했다고 했다. 며칠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최종 면접, 2차 면접 제안까지 받게 되었다. 이쯤 되니 우리 쉐어하우스 메이트들은 매일 수희언니 소식을 궁금해 했고 다 같은 마음으로 언니를 응원하고 있었다.

2차 면접이 예정된 날까지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언니의 변덕을 들어줘야 했다.


"면접을 보러 갈까? 말까? 괜히 에너지 빼지 말고 어차피 안 될 텐데 가지 말까? 그래도 면접이나 보고 올까? 나 시드니에 쉬러 왔는데 왜 이런 일로 스트레스 받고 있지?"


언니는 백번의 고뇌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런 언니가 그저 귀엽기만 할 뿐, 언니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가 없었다. 언니가 이 상황까지 온 게 그저 신기하고 부러울 뿐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한국 학생들이 호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뻔했고 내 주변에는 솔직히 그런 뻔한 사람들만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당일 날 아침까지도 면접보러 안가기로 작정하고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노쇼는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부랴부랴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고, 주영이 언니에게 들었다. 다시 만난 수희 언니는 입이 귀에 걸린 얼굴로 면접 후기를 얘기해 주었다. 최종면접에서 합격, 언니가 채용된 것이다.


최종 면접까지 온 사람은 수희 언니를 포함하여 3명이었다고 했다. 개별 면접 방식이 아닌 회사대표를 포함하여 면접관들 두 명과 최종 면접까지 온 세 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토론하듯 이야기를 나누며 면접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끝까지 망설이다 간 언니는 선택의 여지 없이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에 앉았다고 했다. 모두 다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싶어 비워둔 대표의 옆자리였다. 먼저 자기소개가 이어졌는데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영어도 너무 다 유창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잘 못 알아들은 것들도 많았다고 했다. 그에 비해 언니는 내세울 것이 딱히 없어 그저 안 되겠구나 좋은 경험 했다 생각하고 돌아가자고 마음 편히 가졌다고 했다. 내 기준에서는 똑똑하고 그 분야에 경력도 있고 영어도 잘하는데 뭐가 부족한지, 거기 온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잘 난 사람들인지 궁금해 묻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 회사의 대표는 일본인이었다고 했다. 대표가 이러저런 질문들을 했는데 면접자들은 꽤 전문적으로 대답했고 대표는 그 사람들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되묻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몇 번이나 연출되었다고 했다. 언니는 옆에서 편하게 듣고만 있다가 자기가 이해한 부분을 일본인 대표가 이해할 수 있게 쉬운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더니 대표가 감동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딱 이런 사람이라며, 그래서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까지 고려해서 채용공고를 냈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언니가 최종 합격자가 되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를 채용하면 중간에 취업비자로 전환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행정 절차를 감수해야 하니 처음부터 영주권자나 시민권 자를 뽑는 게 편했을 것이다. 실제로 2차 면접을 보러 왔던 한 명은 시민권 자였다. 다른 한명은 시드니 대학교를 졸업 했던 것 같다고 들었다. (내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보지만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해 둔다.)


언니는 출퇴근 하느라 바빠졌고 나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언니의 옷차림새도 달라졌다. 언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스스로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언니의 일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간절히 구하고, 매사에 상냥하고 긍정적이고, 이런 언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상대를 압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편하게 빠져드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언니가 김태희 처럼 예쁜 얼굴을 가지긴 했지만 정말 예쁜 건, 보는 이마저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웃는 모습이다. 내가 결혼 직후에 언니를 만난 게 마지막이었으니, 얼굴을 못 본지 7년이 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언니의 웃는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다.


수희 언니는 호주에 덜컹 취업을 하게 되는 바람에 장기 휴가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 뒤로 언니는 오래도록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있으니 금방 돌아갈 거라고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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