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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Aug 24. 2020

그리고 베를린에서

베를린 여행기 그 시작,

막내가 부럽다. 그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쟁취한다. 엄마로서 아이와 세상 사이의 조율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싶다.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을 채워가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 착한 아이로 자라왔다. 원하는 것이 있었지만 엄마가 원하는 게 더 우선이었다. 나중에 가선 내가 정말 무얼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엄마, 나 엄마 좋아하는데, 엄마가 나 혼내면 안 좋아할 거야!”

협박인 듯 고백인 듯한 아이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저 귀여운 에피소드로 지나갈 말이 한참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 무조건 엄마를 좋아하지 마, 그래야 엄마도 사랑받기 위해 노력할 테니.


I love you more than my life.

아득해지도록 황홀한 고백이다. J 언니는 태어난 지 막 한 달이 된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 생애 초기에는 입으로 하는 고백과 상관없이 내 삶은 뒤로하고 아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았다. 나의 존재를 그렇게 쏟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 계속 반문한다. 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을 즈음 이곳으로 왔고,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감에 따라 희미해진 나를 다시 채색하기 시작했다. 찾기 시작하자 오히려 상실한 것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제 더는 아이들에게 그런 예쁜 고백을 해 줄 수 없는 엄마가 되었다.

“나는 내가, 내 삶이 더 중요해.”

이 이기적인 마음이 아이들에게 혹여 결여를 남길까 조바심이 난다. 숭고한 사랑을 하는 엄마들과 나를 끝없이 비교한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게 나인걸. 지난 10년은 나인 나와 엄마인 나 사이에 균형을 잡아가는 시간이었다. 적정 수위랄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조율을 해야 했다. 삐걱거리며 아이들에게 나를 내준 시간이었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나를 지켜온 시간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도시로 여행을 왔다. 사람이 많지만, 충분히 커서 복잡하지 않은 도시였다. 집과 장장 600km 떨어진 도시, 베를린.

시골 사람 서울 구경하듯 온 여행이기에 작은 마을에 사는 우리에게 베를린은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남편에게 베를린은 박물관의 도시였고, 아이들에게는 역시나 놀이터만 기억에 남는 도시였고, 나에게는 대신 밥을 해주는 식당들의 도시였다. 랜드마크는 하나같이 흘러간 어두운 역사의 흔적이어서 마음을 무겁게 하는 순간을 감당해야 했지만, 지금의 그곳을 덮고 있는 지배적인 분위기는 자유였다.

(좌) 나를 위한 (중) 남편을 위한 (우) 아이들을 위한



<그리고 베를린에서>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뉴욕의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를 뛰쳐나온 여인, 에스티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억압적이고 통제받는 엄격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튕겨 나오듯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몰래 음악을 함께 들어주었던 할머니가 있어서였고, 함께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에스티를 기꺼이 도우려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녀의 재능과 욕구를 공감해주는 피아노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꿈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에스티가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의 의지 때문이다. 마지막에 남편의 애원을 뒤로하고 베를린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녀의 걸음걸이 그녀의 표정 그리고 배경이 되어 준 베를린. 눈으로 그곳을 확인하고 싶었다. 의지를 다지고 싶었다.


하루 종일 이곳에 머물며 자유를 한껏 들이키고 싶다

아이들 늦게 재울 각오를 하고 늦은 저녁 시간 베를린 돔 앞의 루스트 정원으로 나왔다. 신 박물관(Neues Museum) 옆 제임스 시몬 미술관(James-Simon Galerie)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작은 광장까지 가족 단위 지인으로 구성된 음악가들이 연주회를 했다. 누가 봐주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행복하게 연주했고, 아이들과 함께 그 시간을 공유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그 시간을 즐겼다. 걷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냥 서서 하염없이 음악을 들었다. 구 박물관(Altes Museum) 입구 쪽 공간에서는 무도회가 한창이었다. 거대한 박물관을 배경 삼아 박물관 조명 아래에서 사랑하는 이와 춤을 추었다. 박물관의 새로운 활용이 신박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자신만의 공간을 향유했다. 아이들은 멈추지 않고 뛰었다. 그 넓은 공간은 아이들을 조금도 제약하지 않았고, 그 자유의 에너지는 자리를 잡고 누워있는 남편과 나에게까지 밀려왔다.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별만큼이나 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대로 그들의 삶을 꾸려갈 것이고, 남편은 그대로 나는 또 나대로 각자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함께할 것이다. 가족이란 이름이 구속이 아닌 자유 속의 조화라면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다면…

아이들은, 가족은 내 삶보다 소중하지 않다. 이미 내 삶의 일부다. 공유된 삶의 부분을 소중히 가꾸면서 또 각자의 삶을 만들어 가는 우리를 그려 본다.

 

사랑해. 그리고 내 삶만큼 너희의 삶을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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