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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골목

84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84화. 사랑채의 밤,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와 아빠는
그 가을 동안 사랑채를 같이 쓰셨다.

현미네 사랑채,
오래된 구들방에 이불을 펴고
두 남자는 밤마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방으로 몰래 다가가
살짝 문틈으로 두 사람을 훔쳐본 적이 있다.
작은할아버지는 담배를 피워 문 채
천장을 바라보고 계셨고,
아빠는 옆에 기대앉아
말없이 그 연기를 따라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이 너무 일찍 가셨어.”
작은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그 형님이 바로
아빠의 친아버지, 큰할아버지였다.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세월이 담겨 있었는지를
나는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아버지… 우리 형님 말이다.
너를 참 아꼈지.
지금 살아계셨으면… 아니야,
살아계셨다면 너, 달랐을 거다.”

작은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는 그저 조용히 웃으셨다.

“내가 배운 게 없잖아요, 작은아버지.
국민학교 겨우 마치고,
한문은 서당에서 깨쳤죠.
이래 봬도 논밭에서는 일당 백이었다니까요.”
아빠는 일부러 웃으시며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한은
방 안 가득 고요하게 퍼졌다.

작은할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네가 이 집안에서 제일 든든하게 컸다.
네 어머니가 그리 키워낸 거야.
그리고 네가 이렇게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가르치고 살아가는 거 보면…
형님이 저 위에서 흐뭇해하실 게다.”

그 말에 아빠는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한동안은 불 꺼진 방 안,
작은 불빛 아래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가만히 사랑채 앞에서 그 모든 걸 듣고 있었고,
내 마음엔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차올랐다.

그날 밤,
작은할아버지는
가문의 내력에 대해 천천히,
하나씩 아빠에게 이야기해 주셨다.

장충동 철공소,
도시의 분주했던 젊은 시절,
큰할아버지가 그 시절 겪었던 고단한 나날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아빠를 낳고
그토록 짧은 인생을 마무리했는지까지.

“형님이 군수물자 납품하던 시절,
밤새 기계소리에 시달리며 일했지.
몸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도
말 한마디 안 하더라.
그렇게… 조용히 쓰러졌어.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그 말에 아빠는
천천히 담요를 가슴께로 끌어올리셨다.
그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나는 문틈 사이로 보았다.

작은할아버지는 그날 이후
밤마다 아빠에게 작은 이야기들을 이어가며
조금씩,
조심스럽게,
형과 동생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대화를 시도하셨다.


---

그렇게 며칠이 흐르는 동안
작은할아버지는 아빠와 점점 더 가까워지셨고,
아빠 역시 그 대화를 통해
자신이 잃었던 시간을
되찾고 계신 듯 보였다.

사랑채에선
밤마다 작고 조용한 기척이 들렸다.
나무 바닥 위에 이불이 스치는 소리,
은은한 이야기의 여운,
그리고 가끔씩 흘러나오는
태평소 소리 연습의 희미한 진동.

작은할아버지는 말하셨다.

“네 소리는 말이야,
사람 마음을 울려.
그건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너는 그걸로 사람을 위로하고 있는 거야.”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셨고,
나는 그 순간
아빠가 왜 평생 태평소를 놓지 않았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가을의 사랑채,
두 남자의 조용한 회복.
그건 내 어린 시절
가장 따뜻했던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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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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