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2021-06-21
70년만의 무공훈장 / 연합뉴스 (Yonhapnews)
해군 창설 제75주년 기념식
(서울=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1일 경남 창원 진해 군항 서해대에서 거행된 해군 창설 제75주년 기념식에서 고 최병해 중령의 세 딸들이 부석종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충무무공훈장을 전달받고 있다. 2020.11.11
[해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탐사보도팀 = 지난해 11월 11일 해군은 창설 제75주년을 맞아 진해군항 서해대에서 창설 기념식을 거행했다. 기념식에서는 6·25 전쟁 영웅 고(故) 최병해 중령의 유가족인 세 딸에게 금성충무무공훈장과 종군기장을 전달했다. 70년 만에 전달된 훈장이었다.
최 중령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보다 사흘 앞서 이뤄진 '청진상륙작전'의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같은 해 10월 23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한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최 중령의 둘째 딸 최선화(60) 박사는 "아버지께서는 부하들을 모두 죽게 했다는 고통스러운 마음에 동성무공훈장을 바다에 던져버리셨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수여하기로 한 금성충무무공훈장과 종군기장도 거부하셨다"고 전했다.
이 훈장은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 사업을 통해 빛을 보게 됐다. 동성무공훈장이 분실됐다는 것을 알게 된 해군은 한미동맹의 모범이었던 최 중령의 공적을 기리고자 미 국방부와 협조해 훈장을 다시 수여하기로 했다. 훈장은 미군을 대표해 마이클 도넬리 주한 미 해군사령관이 전달했다.
도넬리 사령관은 수여식 후 최 중령의 딸들에게 "한국전 당시 한미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기여했던 고 최병해 중령의 용감하고 헌신적인 공헌을 다시 한번 기릴 기회가 생겨 매우 특별한 자리였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 최병해 중령의 둘째 딸 최선화 박사(오른쪽)와 셋째딸 최진호 전 수녀
[촬영 정유민 인턴기자]
연합뉴스 탐사보도팀은 지난달 27일 최 중령의 둘째, 셋째 딸인 최선화 박사와 최진호(58) 전 수녀를 만났다. 스페인에 거주하는 첫째 딸 최효선(62) 수녀와는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과 인터뷰를 통해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최 중령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
◇ 신부가 되려 했던 소년, 6·25전쟁 때 사선을 넘나들다
최 중령은 1914년 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교우촌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성적이 좋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프랑스 신부가 최 중령의 부모를 불러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라"고 권해 신학교에 가게 됐다.
신학교 시절 탁발식을 마친 고 최병해 중령(뒷 줄 왼쪽 두번째)
[최효선 수녀 제공]
어느 날 성모회 회원들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이를 본 프랑스 선교사 신부가 노발대발하며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신학생이 처자들과 놀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일로 최 중령은 신학교를 떠나게 됐다. 이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됐는지 최 중령의 딸들은 한 번도 아버지가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후 마음을 가다듬은 최 중령은 박사 학위를 가진 신부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무일푼의 처지를 무릅쓰고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 도착한 후에도 수중에 돈이 없던 그는 일본 통계청 직원을 뽑는다는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 합격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 동포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본 최 중령은 법으로 동포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으로 1940년 4월 도쿄 중앙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해 낮에는 통계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지금의 사법고시에 해당하는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조선 변호사 시보 등을 거쳐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과장으로 일했다.
맥아더사령부 근무 시절의 고 최병해 중령(맥아더 장군 오른쪽)
[최효선 수녀 제공]
6·25 전쟁이 발발하자 최 중령은 해군 창설 멤버(군번 14번)로 참여해 진해 특수임무 기지 및 해병대를 창설했다. 맥아더 사령부의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다양한 전술도 개발했다. 산악지형이 많은 한국에서 UN군의 무전기는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았는데, 최 중령은 전통 농기구인 지게로 문서와 군수물자를 전달하는 '지게부대'를 창설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왔다. UN군과 식습관이 다른 한국군에게 비상식량으로 미숫가루를 보급, 우리 장병들이 최대한 굶지 않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정보장교 역할도 했던 최 중령은 북한군 실정을 파악, UN군에 전달하기 위해 세 차례 이상 38선을 넘나들었다. 함경남도 원산 해역의 수중 기뢰(機雷) 구역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는 등 큰 성과를 올렸다. 동성무공훈장 수훈서에 따르면 최 중령은 1950년 10월 극히 위험하고 불리한 상황 속에서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중요한 정보'를 7함대 사령관에게 전달해 원산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1951년 2월에는 2차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고 최병해 중령이 받은 금성충무무공훈장
[최선화 박사 제공]
최효선 수녀는 "북한에서 첩보활동을 하실 때 아버지를 숨겨줬다가 발각되면 그 집안이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산속에서 주무시곤 했다"며 "심지어 북한군 특수임무 대원인 것처럼 가장하고 김일성 별장에 찾아가 '수령님 임무를 받고 온 사람이오'하고 들어가 주무시고 새벽에 몰래 나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전쟁 중에 성능 좋은 일본 배들이 우리 어역에서 고기를 잡는 것을 알게 된 최 중령은 독도의 대한민국 영토 명기와 영해와 영공 200해리 평화선(이승만 해리)을 제안, 이를 관철했다.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선 328척을 나포해 해군 경비정으로 사용했고, 일본 어부 3천929명을 억류했다. 이들의 석방 대가로 일본 정부에 '일본으로 밀항하다 적발돼 수감 중이던 한국인들에게 영주권을 줘 일본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한국인 수감자 472명에게 특별 영주권과 정착금을 주고 석방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500인, 최 중령의 마음속에 길이 남다
1985년 8월 수녀회 입회를 위해 스페인 출국을 앞둔 세 딸에게 최 중령은 청진상륙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신의 사후에 밝혀달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작전이었던 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북한군에게 상륙 지점과 시기를 속이고자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실제 상륙은 인천에서 했지만, 동해안의 원산, 청진, 삼척, 포항 그리고 서해안의 진남포와 군산 등에 상륙하는 것처럼 기만작전을 했다. 상륙작전을 동해안에서 한다는 등 가짜 정보를 흘려 적에게 혼란을 줬다.
이러한 기만작전의 하나로 최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을 사흘 앞둔 1950년 9월 12일 500여 명의 부하와 함경북도 청진에 상륙했다. 그런데 지원을 약속했던 미군의 함포사격이 없었다. 후속 부대도 오지 않았다. 상륙과 동시에 전멸당할 위기에 놓였다. 미군이 헬기를 보내 지휘관인 최 중령만 데려가려고 하자 최 중령은 "안 가겠다"고 버텼다. 부대원들은 "부디 살아 돌아가 저희가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달라"며 최 중령을 억지로 태워 보냈다.
이처럼 수많은 장병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었기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반격 시 예상되는 막대한 인명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6·25전쟁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최병해 중령이 받은 동성무공훈장
[최선화 박사 제공]
최 중령은 원산상륙작전에서 세운 공로 등으로 1950년 10월 23일 미주리호에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는 미국 군인 신문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 10월호에도 실렸다. 하지만 그는 청진상륙작전에서 부하들을 사지에 남겨 두고 혼자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렸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부하들이 도망병으로 처리돼 유족들이 일말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며 괴로워했다.
그는 해군의 현대화를 위해 동성무공훈장 상금으로 진해에 통제부종합학교와 통제부인쇄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 독도에 대한 우리나라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최초의 책자를 출판했다. 무일푼으로 남하하는 피난민을 구휼하고, 한국의 국제 지위를 높이기 위해 국제법학회를 창설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에 모두 쓴 결과 그의 수중에 상금은 단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전역 후 변호사 등으로 활동한 최 중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권에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군사정권을 비판했다고 한다. 이후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유신 시대에만 존재하던 '대통령 모욕죄'가 적용돼 변호사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딸들은 "아버지께서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니 집안은 더욱 가난해졌다"며 "어렸을 때는 가난이 창피해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최 중령은 1994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선화 박사는 "아버지의 일평생 바람대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청진상륙작전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명예를 조국이 찾아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고 최병해 중령 약력
[최효선 수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