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리얼리스트 Jun 29.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16

한옥 1874(3)


그는 해뜨기 한 시간 전 현장에 도착했다. 아내가 챙겨준 음식을 마당에 펼쳐 놓고 홀로 고유제를 지냈다. 떡과 과일, 음식을 차리고 절을 했다. 오랫동안 집을 지켜준 토지신과 여러 토속신앙의 신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사고 없이 해체와 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는 덴조 등이 철거된 현장을 꼼꼼히 둘러봤다. 내부 철거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을 마감할 날짜가 4일 밖에 남지 않아 걱정이었다. 사장님을 비롯해서 일꾼들이 도착했다. 사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에 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런데 문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던 옛 문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장님께 물었다. 사장님은 친구가 테이블을 만들겠다해서 주었다고 답했다. 그는 눈빛으로 화를 냈다. 사장님은 뭔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는 카메라를 열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찍은 것은 마룻대의 상량기문이었다.

 상량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鳳龍 崇禎紀元後五甲戌  八月十一日丑時開基  同月十三日未時安礎  同月十八日申時(?)立柱  同月二十日寅時上樑  甲戌 癸酉 庚寅 戊寅 酉坐 天遇合德 人遇合德 天人所强 百事昌吉 福貴傳世 子孫萬堂 -종이(檀紀 四貳八0年 丁亥八月拾貳日 移居干去家) 龜麟


봉용 숭정기원후오갑술 팔월십일일축시개기 동월십삼일미시안초 동월십팔일신시(?)입주 동월이십일인시상량 갑술 계유 경인 무인 유좌 천우합덕 인우합덕 천인소강 백사창길 복귀전세 자손만당 –종이(단기 사이팔공년 정해팔월이십일 이거간거가) 구린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다. 한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혹시 내용이 틀리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봉용- 봉황과 용이라는 재액 방지 문자. 화재나 수해를 막기 위해 쓴 상징적인 글자인 듯하다.  

숭정기원후오갑술-숭정기원후오갑술년은 1628년부터 다섯째 갑술년으로 1874년이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숭정연간이라고 하면 의종의 재위기간인 1628~1644년이 된다. 따라서 '숭정기원'은 서기 1628년부터를 일컫는다. 이때부터 5 갑술년은 1874년이다.  

팔월십일일축시개기-8월 11일 1시경 개기제를 지낸 듯하다. 개기제는 ‘텃고사’ ‘개기식’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집터를 만드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땅은 토지신의 것이고 사람은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잠시 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개기제는 집터를 닦는 의식인 동시에 토지신에게 마음을 전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이런 행위에는 땅이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소유이거나 신 자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에서 토지 신에게서 땅을 산 매지권이 나온 것으로 알 수 있다. 왕조차도 땅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문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새벽 1시에 개기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양보해서 3시에 지냈다고 해도, 이 시간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아마도 주인의 사주를 짚어보고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개기제를 지낸 듯하다. 지나친 추리일까.

동월십삼일미시안초-8월 13일 13시 경에 초석을 놓았다. 초석이 다듬어진 돌이다. 기둥의 크기에 맞춰 미리 다듬어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동월십팔일신시(?)입주-8월 18일 15시 경에 기둥을 세운다.   

동월이십일인시상량-8월 20일 오전 3시 경에 상량을 했다. 오전 5시에 상량을 했다해도  이른 시간이다. '상량'은 보 위에 올리는 마룻대(종도리)이다. 목수 두 사람이 대들보 양쪽에 서서 '상량'을 잡아맨 무명을 쥐고 들어 올려 건다. 상량을 할 때 반드시 고사를 지낸다. 이 고사는 집 짓는 과정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르는 잔치이다. 형편이 어려울지라도 거르지 않는다. 이러한 잔치를 새벽 5시부터 열었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놀 줄 아시는 분들이다.

우리 옛 어른들은 가옥을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만이 아닌 인격체,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다. 집을 짓는 과정을 한 분의 성주신이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주춧돌을 놓으며 성주신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했다. 기둥을 세우면 성주신의 뼈대가 생성된 것으로 보았다. 상량을 하면 비로소 성주신의 혼이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상량고사는 성주신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치관은 며칠 후 마룻대에서 발견한 상량문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상량문은 마룻대 상단에 파인 홈에 보관되어 있었다. 내용은 마룻대의 상량기문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집의 입주 사주와 상량 사주, 가주의 사주를 더 명확하게 표기했다. 사주는 사람의 생년·생월·생일·생시를 부여한 명칭이다.  두 글자씩 모두 여덟 글자로 "팔자"라고도 한다. 사주팔자를 풀어보면 그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알 수 있다 해서 사주를  '운명'이나 '숙명'의 뜻으로 쓰기도 한다. 이러한 사주를 가옥에도 부여했다. 집을 하나의 운명체로 보았다는 증거이다. 사람의 사주로 운명을 예측하는 것처럼 사주로 이 집의 운명을 예측해 본다면 이 집의 사주는 좀 다른 운명을 지니지 않았을까.

갑술 계유 경인 무인-상량사주를 기록한 듯 하다.

유좌-집의 방향을 기록한 것으로 '동향집'임을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우합덕 인우합덕-그러니까......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대략 하늘의 덕과 사람의 덕이 하나를 이룬다......는 뜻 같아 보인다.

천인소강-그러니까......하늘의 덕과 사람의 덕이 어우러져......강해진다?

백사창길- 모든 일들이 길하게 번창할 것이다라는 뜻 같아 보인다.

내려 읽기를 다시해서 '천우합덕 천인소강 인우합덕 백사창길'로 연결 해본다면 '하늘의 덕을 얻어 사람은 비로소 단단해지고, 사람은 덕을 길러 모든 일이 번창 하리라' 이런 뜻 같기도 하다.(인터넷에도 해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다닐 때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할 걸 그랬다.)

복귀전세 자손만당-귀함과 복이 자손만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보인다.

종이(단기 사이팔공년 정해 팔월이십일 이거간거가)-'단기 4280년 정해년(1947년) 8월 12일에 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라는 뜻으로 보인다.

구린-처음에 쓴 봉황과 용처럼, 거북이와 기린이라는 재액 방지 문자로 보인다.


이 상량기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종이에 쓴 문장이었다. '단기 사이팔공년 정해 팔월이십일 이거간거가'  단기 4280년 정해년(1947년) 8월 12일에 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뜻으로 본다면 1874년에 어떤 유학자가(상량문의 글씨도 좋았으며,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는 문장이었기 때문에) 이 집을 짓고 약 73년 간 살았다. 1947년에 누군가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사를 올 때 종이에 그러한 내용을 기록해서 기존의 상량기문에 부착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러한 그의 추리는 나름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을 할 때 지나가는 마을 분들에게 여쭤봐도 집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집에 살았다는 분을 만나보려 했지만 소재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1947년의 이사'라는 추리가 맞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집 곳곳에 강점기 때 수리한 흔적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좌측 첫칸과 둘째 칸 사이에 있었던 이 들보는 다른 나무와 색이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이와 유사한 형태(들보의 끝을 사선으로 잘라낸 형태?)의 결합방식을 수리 중인 공주의 김갑순 가옥에서 봤고, 이러한 형태가 강점기 치목 방식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혹여 잘못된 정보이거나 추리이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공주 김갑순 가옥 들보(강철조 목수님 제공)

대들보와 대들보 사이에 놓인 나무 또한 손으로 다듬거나 조선톱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제재소의 대차나 소차를 이용해서 재단한 나무처럼 보였다. 대들보 아래 기둥이 없었고, 집 내부 곳곳에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기둥과 인방재가 없는 곳도 많았다. 이렇게 제거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대들보의 오른쪽이 툇칸이다.
두 개의 대들보 모두 왼쪽에 기둥이 서있었을 것이다. 기둥의 흔적이 보이고 장여 하나가 제거된 자리도 보인다.
기둥과 기둥을 이었을 인방재의 흔적도 보인다.
집의 가장 좌측 칸. 변형된 공간이다.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이 궁금하다.

가장 오른쪽의 긴 방은 원래는 부엌이었으나 방으로 개조 되었다. 방에는 정교하게 만든 벽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천장의 반자를 제거하니 목재들에 그을음이 잔뜩 배어있었다.



이 집이 요양원 건축으로 철거 위기에 놓이지 않았었다면 해체해서는 안되는 집이었다. 1874년과 1947년의 건축기법, 나아가 70~80년대의 건축 기법을 온전히 품고 있는 집이었다. 즉 건축 기술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의 뒤에서 찍은 사진이다. 흰 건물은 70~80년에 새로 지은 화장실이다.

더불어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유산이었다. 무엇보다 부재들이 아름다웠기 때문(그의 관점에서....)이었다. 이렇게 사라진 집이 얼마나 많을까. 그가 목재를 해체해서 보관하고 나아가 이축한다면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수리된 흔적은 지붕에서도 볼 수 있었다. 1947년에 수리하면서 제거한 인방재며 기둥 등이 지붕 속에 모두 들어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툇보와 대들보가 한 몸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외암마을 참판댁과 같았다. 그는 수학의 난제를 풀어낸 고등학생처럼, 밀려 쓴 답안지가 100점을 맞은 것처럼 기뻐했다.

참판댁의 대들보와 이 고택의 대들보는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대들보와 툇보가 하나라는 점은 동일하다.


왼쪽 사진의 대들보 하단을 보면 기존에 있던 기둥이 제거 된 흔적이 보인다.

대들보 위에 종보를 올리고 그 위에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올렸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물론 그렇게 만든 오량집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외암마을의 참판댁의 경우는 서까래가 단연(짧은 서까래)과 장연(긴 서까래)으로 이루어진 오량(단면강 봤을 때 도리가 다섯 개인 집)구조인 것과는 달리 이 집은 오량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서까래가 마치 삼량가처럼 양쪽으로 하나씩 걸려 있었다는 점에서(장연과 단연으로 나누어 걸리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왜 하나만 걸었을까? 궁금했다. 서까래를 양쪽으로 하나만 거는 것은 집의 측면 폭이 짧은 경우 등 여러 이유가 있다고 했으나 설명할 수 있을만큼 이해하지를 못했다. 오량집의 구조와 서까래가 하나만 사용된 이유 등은 공부를 좀 더 해서 나중에 기록할 집에서 설명하고 싶다.


둘째 힌트였던 다락방이 있는 장소이다. 아래가 새롭게 수리된 부분이다.
다락방
다락 마루 하단
툇마루 위에 있는 나무를 어디에서 찾았는지 모르겠다. 제거된 인방제와 기둥 같아 보인다.
기와가 온전한 집의 마지막 모습이다.

상량문을 해석하면서 너무 많은 머리를 써서 어지럽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 할까 보다.

그가 벌려 놓은 일 때문에 나도 고생이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성석제처럼 유쾌한 문장으로 글 몇 개만 써보려 했던 것인데.....

문장은 원점으로 돌아오고

일은 커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15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