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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Jul 01.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17

한옥 1874 (4)

삼일째 날이 밝았다. 그가 투입되었다. 김 사장님은 내부를 어디까지 철거해야 될지 몰라 기본적인 것들만 철거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도 사진만 보고 판단할 수 없어 일단 유보를 해놓은 상태였다. 김 사장님은 전날 오후에 지붕을 철거했다.

지붕은 많이 철거된 상태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에 물매(?), 경사 잡기 위해 덧서까래를 만들어 놓아 남은 일이 많았다. 덧서까래는 1947년도에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만든 듯 했다. 덧서까래 위에 집 내부를 수리할 때 철거한 자재들이 섞여 있었다. 원래 지붕 자리에 온전한 토기와 몇 개도 남아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나 이전의 집에도 이러한 덧서까래로 지붕의 물매를 만들었는지 궁금해했다. 처음부터 대공이나 동자주를 높게 올려서 지붕 각도를 확보하면 안되었을까 궁금했다. 나는 그가 왜 이런 것들을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다.

당일까지 지붕의 보토와 적심 등을 철거해 놓아야 했다.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집을 해체하는 일은 절대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골조의 해체는 다음 날부터 사촌 동생 한과 훈이 담당하기로 했다. 한은 관급 공사 기일까지 미뤄가며 일에 합류하기로 했다. 훈은 배추값이 좋았으나 일을 미뤘다. 조 목수는 서울에서의 일을 미룰 수 없어 이번 해체 공사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가가 없으니 마음이 불안했다. 일은 잘 마무리 되었지만 다음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안전하게 일 하기 위해 마지막 날 크레인을 예약했다.


김 사장님의 직원 3명과 한 명의 일용직을 더해 총 다섯 명의 일꾼이 지붕에서 일을 했다. 그는 지붕에 올라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목재 보관 창고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떨어질뻔한 상황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지붕의 자제가 삭아 그의 다리가 빠졌고 삼층 높이에서 떨어질뻔한 경험을 한 뒤에 그는 지붕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지붕에 올라갔다. 바닥에 이동식 비계가 설치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일이 급했다. 그가 감당해야할 두려움이었다.

지붕 일을 하면서 그는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을 발견했다. 첫째가 처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특이한 모양의 합각이었으며, 둘째가 굴뚝. 셋째가 연침. 마지막이 추녀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덧서까래 아래에는 합각(팔작지붕의 옆면에 만들어지는 삼각형 모양의 벽면)의 원형이 그대로 있었다. 우진각 지붕 위에 단을 쌓고 그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나무올린다. 그 위에 서까래를 걸고, 서까래 위에 용마루의 곡선을 닮게 깎은 나무를 올린다. 자귀 자국과 용마루 선을 닮은 나무의 곡선이 그에게 인상적이었다. 1870년대 합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 그는 즐거웠다.(그런데 그것이 즐거운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형태의 합각은 양쪽 모두에 있었다. 반때쪽 함각에는 굴뚝이 있어 좀 더 특이해 보였다.


 

 이 굴뚝, 그런데 이것이 굴뚝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굴뚝에 별로 그을음이 없었다. 그을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내부 목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을음이 없었다. 내부에서도 굴뚝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굴뚝이라 생각했다. 나아가 까치구멍굴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까치구멍굴뚝은 집안의 연기를 빼고 부엌으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붕 용마루의 양쪽 끝에 만든 굴뚝이다. 용마루에 까치 구멍같은 구멍을 내고 이엉을 얹었다고 한다. 까치구멍집은 경상북도 안동을 중심으로 영주, 청송, 영양, 울진 및 강원도 남부 지방의 산간에 분포한다고 한다. 까치구멍집은 부엌에 연기가 많이 나거나 더운 여름철일 경우, 출입문과 마루 뒷문을 함께 열어 놓으면 맞바람이 불며 공기가 부엌 천장의 까치구멍으로 빠르게 빠져 나간다. 이는 겨울에 집안을 훈훈하게 해주고 여름철에는 실내를 서늘하게 식혀준다. 부엌의 연기도 잘 빠져나가게 한다. 그런데 이것을 까치구멍굴뚝으로 볼 수 있을까? 까치구멍굴뚝의 지정학적 분포와 집 전체의 구조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까치구멍굴뚝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새집은 아닐 것 같고........그는 그냥 굴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붕 양쪽의 합각을 보고 드는 생각은 이러한 지붕, 합각의 형태가 초가지붕을 만들기 위한 구조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가 지붕의 구조를 직접 확인해 보지 못해서 확언을 할 수는 없지만, 지붕에 토기와의 잔해가 남아 있어서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붕이 초가였을 것이란 의심은 지울 수 없었다. 합각 서까래에 기와를 올린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합각에 기와를 올리기 위해서는 지붕의 다른 곳처럼 개판이나 산자를 깔고 강회 다짐을 하고 흙을 올린 후에 기와를 설치했을 텐데 그러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붕을 수리하면서 그런 것들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흔적이 남아 있었야 하는데 너무도 말끔했다. 나아가 기와를 올리기에 합각에 설치된 서까래의 간격이 넓어 보였다. 합각에는 적새, 용마루, 추녀마루 등이 설치되고 따라서 상당히 많은 양의 기와가 올라갈텐데 생각보다 넓은 간격으로, 적은 숫자의 서까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지붕이 처음에는 초가가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물론 14칸에 이르는 집의 규모로 봤을 때 기와를 올리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여러 이유로 큰 집에도 기와지붕이 아닌 초가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첫째는 외부의 시선이다. 양반이 아닌 상인이나 중인 계층이 큰 집을 짓고 기와를 올리면 당연히 눈에 띨 수밖에 없다. 집 치레가 과해 관의 시선, 양반의 시선이 쏠리면 이로울 것이 없으니 집은 크게 짓되 지붕은 초가를 올리는 것이다. 위계 질서 속의 시선과 관심, 억압으로부터는 탈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는 실용성을 목표한 것으로 기와를 이는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지 않고 지붕을 만들 수 있고, 보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용이나 관리 면에서 초가지붕은 기와지붕에 비해 실용성이 높다. 이런 실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큰 집에도 초가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끝으로 초가가 가난한 서민들만 살았던 집은 아니다. 안빈낙도, 빈이무원을 추구했던 선비들도 초가를 고수했다. 그 대표적인 분이 실학자 이재 황윤석이다.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의 황윤석의 생가의 안채는 전면 일곱칸 반, 측면 두칸에 이르는 큰 집입에도 불구하고 초가지붕이다.

집의 규모를 떠나서 호남의 4대 실학자로 손꼽는 이재 황윤석 선생이 사랑채가 초가 지붕이라는 것은 선선한 삶의 기품을 모여주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1874년 지붕도 처음에는 초가지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셋째는 연침이었다. 1874년, 개화기 이전에 지어진 집이니 당연히 연침이 있었다.  연침에 대해서는 묵은집(1841)과 동학집(1893)집에서 이미 설명했음으로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묵은집(1841)의 연침 구멍은 육각형, 동학집(1893)집은 사각형이었다면, 이 집의 연침 구멍은 팔각형이었다.


끝으로 추녀를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길고 두꺼운 추녀를 연결하는 방식이 특이해 보였다. 묵은집에서는 강다리(?), 동학집은 모르겠고, 1928년 집에서는 종도리 위에 두 추녀를 따로 구분을 해서 못을 박아 걸었었다. 이 고택에서는 두 추녀를 묶어서 커다란 연정으로 종도리에 고정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묵은집-1841
1928년 한옥
1928년 한옥
1874년 한옥
1874년 한옥 추녀 고정 방식

더불어 추녀와 추녀 중간에 나무를 걸어 고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무를 걸면 추녀가 도는 일이 없으며 서까래의 하중으로인해 추녀가 들리는 들릴 가능성이 적어질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지붕에서 특별한 몇 가지들을 확인했다.


일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이 지붕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태국 사람들이었고, 지붕 흙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오후에 포클레인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포클레인이 집게를 이용해 흙만 거두어 주면 그런대로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집에 포클레인을 사용하는 것이 옳을까 그는 고민했다. 1874년에 지어진 집인데.......나무 하나가 150년이 된 집인데..... 서까래 하나라도 부러지는 것이 싫은데.......결국 포클레인을 부르기로 했다. 다만 집게를 이용해서 나무에는 손상이 가지 않게 흙만 걷어 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은 옳았다. 포클레인 기사님의 솜씨가 좋아 흙만 걷어 내었을 뿐 나무는 손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에는 아직도 많은 양의 흙이 남아 있었다.

포클레인이 오기 전에 그는 사람들과 함께 몇 가지 준비를 해놓았다. 첫째는 내부 인테리어된 나무를 해체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덧서까래 위에 있었던, 예전에 해체한 부재들을 모아 한쪽을 옮겨 놓는 일이었다. 덧서까래 위에는 처음에 집을 지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목재들이 꽤 있었다. 그 중 목기연을 통해 지붕에 합각이 있었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둔태로 보이는 것 등 수리를 하면서 해체한 나무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 나무들 또한 150년은 넘은 듯 해서 잘 가져왔다.

끝으로 그가 직접 집의 평면도를 그리고 부재에 번호를 기록하는 일이었다.(사촌 동생 한은 한옥 부재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일을 시작했다. 몇 사람은 예전엔 부엌이었으나 긴 방과 입식 부엌으로 개조된 곳을 해체했다. 벽장이며 문 등이 194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보존할 가치가 있었으나 훼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무가 얇고 약해서 쉽게 손상되었다. 그나마 손상이 덜가게 정성 것 해체했다. 속도가 느렸다.

다락 하단

부재 사이의 간격을 재 간단하게 평면도를 그렸다. 그가 처음으로 그린 평면도였다. 조 목수가 했던 것처럼 모든 부재의 중앙을 기준으로 표기했다. 조 목수처럼 자 단위가 아닌 cm 단위를  이용해표기를 했다. 도편수라면 이해할 수 있을리라 생각했다.

평면도와 함께 부재에도 넘버링을 했다. 아쉬운 점은 서까래에 번호를 써 놓지 못한 점이다. 서까래의 상태가 좋아 재활용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는데 번호를 써 놓지 못한 것이 그는 못내 아쉬운 듯 했다. 넘버링은 정면을 기준으로 했다. 이 정도의 평면도와 넘버링이면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포클레인이 도착했다. 담을 무터뜨리고 마당으로 들어온 포클레인은 조심해서 흙을 걷었다. 사람의 손가락이나 포클레인의 집게나 큰 차이가 없었다. 해가 질 때 포클레인은 떠나고 그날 일이 마무리 되었다. 지붕에 흙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 다음날 오전까지는 지붕의 흙을 걷어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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