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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Jul 04.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19

한옥 1874 (마지막)

(앞 글을 일부 이어서) 그와 태국 사람이 부엌 상단의 우미량을 내렸다. 부엌이 있던 자리, 우측 끝 두 칸은 좌측 끝 두 칸과는 다르게 오량에서 두 개의 우미량이 내려오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 우미량을 내리면서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헛보머리였다. 강철조(고건축 우보만리) 도편수님이 알려준 이 헛보머리를 내릴 때는 알지 못했다. 보를 내려놓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이를 옮기려는 태국 사람이 나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는 것이었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을 부를만했다. 보 머리가 보의 몸과 한 몸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었다.

처음에 이를 보고 집을 한번쯤 수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약 6m에 이르는 대들보를 네 개를 사용할 정도로 좋은 목재를 쓰는 집에 나무가 모자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에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붕의 합각 구조 등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니 이 부위는 수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이 정도 수리를 위해서는 상부의 흙을 제거하고 도리 등을 분리해야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이축'이었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집을 이곳으로 이축하는 과정에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한옥학과 교수님의 대들보가 남쪽 지방의 나무가 아닌 것 같다는 말과 함께 특이한 것이 몇까지 보인다는 말, 그리고 전면 우측의 둘째 기둥만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다는 점 등은 이축을 생각하게 했다. 아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진을 공주 김갑순 가옥을 수리하고 계시는 강철조 목수님께 보내니 이는 '헛보머리'이고 정밀한 연결이나 나무의 상태 등을 봤을 때 집을 지을 당시에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 답해 주었다. 그리고 옛 목수, 지금의 목수들도 나무를 상당히 아껴서 집을 짓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두 장의 사진을 보내 주셨다. 그 사진은 영업 비밀 같았으나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왼쪽 사진은 익공집의 창방인데 익공 조각 상부를 보면 덧댄 흔적과 나무를 볼 수 있다. 이런 부재같이 몸통이 굵고 앞쪽이 얇으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나무를 덧대 조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우측은 공주 김갑순 가옥 수리 전 사진인데 이 부분은 추녀 뒷초리 오량외기 자리라고 한다.(그냥 추녀를 거는 뒤쪽 부분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사진 좌하에 보이는 나무토막은 도리 뺄목인데 도리의 몸은 없이 뺄목만 있다. 긴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뺄목을 넣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목수도 옛 목수도 나무를 아껴 집을 지은 것이다. 헛보머리도 나무가 짧아 그랬을 수도 있다.

그는 '헛보머리'가 지을 때부터 있던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우미량의 보머리를 확인해 보았다. 목수는 자기만의 보머리 모양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목수와 구분되는 자기만의 보머리 모양이 있다면 분명 다른 쪽 우미량의 보머리 모양도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맞았다. 두 우미량의 보 머리는 동일한 모양이었다. 상부는 세모이고 아래쪽 모서리는 각을 접은 형태의 모양이었다. 각도도 거의 동일했다. 다만 보 몸통과 보머리를 잇는 연결 부위의 두께만 조금 달랐다. 다른 보 머리는 형태가 불분명했지만 이 둘만으로도 같은 목수가 조각한 것이 맞을 것 같았고 강 목수님의 설명대로 집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헛보머리를 만든 것 같았다. 따라서 이 집은 후에 수리된 것도 이축된 것도 아니었다.

혹시 몰라 '동학집-1893'의 보머리를 확인하니 1874년의 이 집과 보 머리 조각 모양이 거의 흡사했다. 다만 동학집의 경우 상부 세모가 밋밋한 것에 비해 1874년의 이 집은 세모에 굴곡이 들어간 형태였다. 차이가 있었다. 옛날에는 보머리를 이러한 형태로 만들되 부분 부분 변형을 주어 목수만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1893년 동학집의 보머리


헛보머리는 나름 결론을 내렸으나 왜 전면 우측 둘째 기둥만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그 기둥에 걸려있는 대들보 크기의 부재에 사용되지 않은 끌 자국이 남아 있을까? 그는 궁금해했다. 나는 전자는 나무가 모자랐음으로 후자는 1947년에 수리하면서 변형을 주어서가 아닐까 하고 답했다.


도리 등을 해체하고 그들은 드디어 대들보를 내렸다. 대들보를 내리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놓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대들보를 내릴 때는 누구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잡아 대들보를 뽑는 것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한쪽을 담당했고, 한이 한쪽을 담당했다. 훈은 양쪽으로 이동하며 상황을 통제했다.  

대들보는 기둥 위에 올려져 있었고, 대들보 위에 동자주가 걸리고 그 뒤에 다시 종보가 올라가 있는 형태였다. 종보와 도리를 제거하고 그 아래 동자주를 제거한 뒤에 대들보를 기둥에서 뽑아 상인방에 걸쳤다. 반대 쪽에서 뽑을 준비가 되면 이쪽에서 대들보가 수평이 되게 들어주고 반대쪽에서 대들보를 들어 올려 뽑아냈다. 대들보는 수평이 되지 않으면 절대 뽑히지 않기 때문이다. (몇 문장으로 기록했지만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대들보를 한쪽씩 바닥에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들보를 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들보를 들어서 차에 실어야 하는데 9명의 사람이 이 대들보를 들려해도 들리지가 않았다. 고심하는데 태국 사람이 둥근 나무들을 대들보 아래에 괴고 밀어내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아마도 고인돌도 그런 형태로 이동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 제공 및 열심히 일을 해주어서 그는 태국 사람들에게는 그날 일당에 보너스를 더 주었다고 한다. 나는 잘했다고 칭찬했다. 어렵게 굴리고 밀고를 해서 대들보를 트럭에 실어 창고로 이동시켰다.

창고에서도 대들보를 내릴 수가 없어 그쪽의 인력사무소에서 사람을 구해 대들보와 다른 부재들을 내릴 수 있었다. 여기에서 대들보 이야기를 조금만 하고 넘어가야겠다. 우리 옛 어른들은 죽은 나무로 마룻대나 대들보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대들보를 생명체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들보를 생명체로, 인격체이고 간주했기 때문인지 대들보와 관련된 몇 가지 터부가 있었다. 안채의 대들보로 썼던 것을 행랑채나 사랑채 등 하위의 대들보로 사용하거나, 대들보를 기둥 등의 부재로 강등시켜 사용하지 않았다. 집을 수리할 때에 지붕 부분의 종도리는 바꾸기도 하나, 대들보는 집을 헐기 전까지는 교체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 남의 집 대들보로 썼던 것을 자기 집 재목으로 쓰지 않는다. 배려했던 것이다. 대들보와 관련된 여러 속담에서도 대들보의 위계를 알 수 있다. “대들보가 부러지면 집안이 망한다.”, “대들보가 울면 가장이 죽는다.” 등의 속담은 대들보는 가옥에서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재이므로, 대들보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가장에게 변고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산모가 난산일 때, 대들보에 매어 놓은 끈을 잡고 힘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대들보를 가장으로 믿고 의지하는 속신에 기인한다. ‘임원경제지’에도 “들보와 기둥이 한쪽으로 기울면 집안에 시빗거리가 많이 생긴다.”라고 경계하였다. 그들은 이런 대들보를 훼손 없이 안전하게 해체해서 창고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안방 우측의 다락마루를 해체했다. 마루는 재료와 위치 그리고 구실이나 놓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른다. 누마루는 본채에 잇대어 한 층 높게 놓인 마루이다. 보기에도 좋고 누마루 아래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편리하다. 다락마루는 다락처럼 높게 놓은 마루이며 뒷마루는 집 뒤쪽에 있는 마루를 가리킨다. 쪽마루는 기둥 밖으로 달아낸 마루를 말하고, 툇마루는 기둥 안쪽 툇칸에 있는 마루이다. 마루 하면, 바닥에 널쪽을 깐 ‘널마루’,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마루’, 강점기 이후에 주로 설치한 긴 판자를 깐 ‘장마루’ 등을 떠올리지만 흙으로 쌓은 ‘토마루’도 있다. 우리는 먼저 다락마루를 해체했고 마지막에 기둥과 함께 툇마루를 해체했다. 쪽마루는 이미 며칠 전에 해체한 상태였다.

대들보를 내리고는 집을 해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두 팀으로 나누어 해체를 하니 속도도 빨랐다. 인방재를 해체하고 마지막으로 기둥을 뽑았다. 기둥 중에 전면의 원주 상태는 좋았지만 2열, 3열 4열의 기둥은 썩 좋지 않았다.

1947년에 집을 수리하면서 기둥 하단의 습기 배출 및 통풍에 유의하지 않은 탓인 것 같았다. 옛 목수들이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 주변에 기와나 돌을 이용해 통풍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주 큰 포클레인이 들어와 터를 정리했다고 한다. 김 사장님께 주춧돌과 기단석(집의 규모로 보아 있었을 것 같다.)을 가져간다고 말했으나 터리 정리하면서 보니 주춧돌은 상태가 무척 좋지 않고 기단석이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여러 조건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현장에 상황이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1874년에 지어진 7칸 겹집을 해체했고 이동을 마쳤다. 그는 나무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150년의 세월이 누적된 집이므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1874년에 지어진 집과 관련된 글의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1928년도에 지어진 일명 '유하당'이란 집에 대해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검색어 유입을 보니 '나는 집을 직접', '서이당', '진안 서이당', '시골집 고치기', '직접 집 고치기'등이 있었습니다. '나는 집을 직접 고치기로 했다' 매거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독자 분들에게 허락을 맡고 글을 삭제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책은 9월 말 경에 출판될 예정입니다. 그전에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몇몇 글들과 마지막 글인 전체 비용에 관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책을 내는 과정과 글쓰기에 관련된 글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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