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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Jul 08.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20

남원 몽심재를 바라보며.

몽심재를 바라보며

며칠 전 남원 수지면의 몽심재를 다녀왔다. 참 아름답고도 훌륭한 집이었다. 건축물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살았던 주인들, 그리고 그 주인들의 마음과 행동, 가치관이 더 아름다운 집이었다.

 

몽심재는 고려 말 조선 개국을 반대하고 숨어든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박문수의 16대손인 연당 박동식(1763~1830)이 지었다. 몽심재(夢心齋)라는 당호는 박문수의 시의 끝 두 글자를 차자해서 지었다고 한다.


隔洞柳眠元亮 (격동류면원량몽)

마을 등지고 잠든 수양버들 도연명을 꿈꾸고

登山薇吐伯夷 (등산미토백이심)

산속 굽은 고사리 백이의 마음 토하네


몽심재의 '몽'은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속세를 등진 도연명의 가치관을 지향한다. 도연명이 지방 관리로 있을 때 상급 기관의 관료가 순찰사가 온다고 하여 의관을 정제할 것을 권유받는다. 도연명은 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소인을 섬기는 일은 할 수 없다며 그날로 사임하고 낙향한다. 고향으로 돌아간 도연명은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집 앞에 심고, 자연과 더불어 즐기며 시와 문장을 남긴다. 도연명의 이러한 은거는 현실에 대한 소극적 도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전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후 왕조에 대한 저항이 내포되어 있다. 도연명을 지향하는 화자의 마음을 버드나무를 빌려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몽심재의 '심'은 백이와 숙제의 충절을 지향하는 것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하자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수양산에 몸을 숨기고, 주나라의 곡식을 거부하고 고사리만 캐 먹다 굶어 죽는다. '심'은 백이숙제의 결연한 마음을 닮고자 하는 것이다. 굽은 고사리이니 그 토하는 모습이 격하다.

몽심재의 '재'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이거나 혹은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는 건물을 칭할 대 쓰는 단어이다. 서열과 위계 중심의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거처에 붙일 수 있는 당호에도 그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의 순서가 된다.

당호를 비롯해서 호를 지을 때는 크게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가 생활하고 있는 지역이나 인연이 있는 처소 자체를 호를 삼는 소처이호(所處以號), 둘째가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호를 삼는 소지이호(所志以號), 셋째가 처한 환경이다 여건을 호로 삼는 소우이호(所遇以號),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소축이호(所蓄以號)이다. 박문수의 시에는 '충신불사이군'이라는 가치관을 담고 있고, 그 가치관을 지향했으니 소지이호(所志以號)의 방법으로 당호를 지은 것이다.


몽심재는 박문수의 16대손인 연당 박동식(1763~1830)이 지었다 하니 약 250년 된 고택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몽심재는 원불교의 소유이다. 박 씨 집안의 마지막 소유자 박인기 씨가 원불교에 희사하였다. 원불교에서 몽심재에 교무를 순환 배치하며 관리하고 있다. 몽심재에 막 들어섰을 때 대문채의 방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계시는 교무님을 만났다. 그 교무님을 통해서 몽심재의 내부를 들어갈 수 있었고, 유물을 볼 수 있었으며, 몽심재의 옛 주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교무님은 처음부터 집과 주인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셨다. 일행과 같이 몽심재를 즐길 시간을 충분히 주시고 이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셨다.   

대문채 좌측에는 연못이 있었다. 동행한 일행과 교무님은 소쇄원을 연상시키는 연못이며 풍수지리를 고려했을 때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기운을 모으기 위한 연못으로 보았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여기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물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연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추가했다.

관직이 높은 사대부 집에서는 물을 완상하고 물을 통해 관조하는 마음과 선비 정신을 기르기 위해 집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조선의 개국공신 권근은 ‘물은 그 근원이 높기 때문에 오물이 모여들 수 없고 그 흐름이 빠르기 때문에 흐린 것이 머물 수 없으며, 돌이 있어 부딪치고 모래가 있어 걸러진다. 비록 물은 그 변화함이 한이 없으나 그 맑음은 자약하며 졸졸 콸콸 밤낮없이 만고를 지나도록 쉬지 아니하니 공부를 하는 선비가 이를 보고 그 마음을 맑게 하고 그 천성을 회복해서 선(善)에 머물게 하고 떠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러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보면 늦가을 흐르는 물을 보는 선비의 모습을 통해 관조의 경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왜 늦가을일까. 여름을 지내는 동안 물은 바람과 비로 인해 혼탁해진다. 바람과 비가 아니더라도 살기 위해 쫓고 쫓기는 물고기들로 물은 잔잔할 틈도, 먼지를 가라앉힐 여유도 없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물은 차가워지며 맑아진다. 고기들도 살을 찌워 바위틈으로 들어가 겨울을 준비를 하면 물은 침잠하며 고요해진다. 선비들은 그 명징한 물을 보며 관조의 경계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러한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선비들은 물가에 정자를 지었고 집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몽심재의 연못도 집안에 기운을 모으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물을 통해 선비의 마음을 기르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연못으로 유입되는 물은 외부 계곡에서 들어오는 물도 있지만 집 지대의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도 있었다. 이 물을 수로를 만들어 연못으로 유입시켰다.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물을 내보낼 때 사용하는 수로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도랑인 개거(開渠), 돌로 배수관을 만들고 그 위를 다시 돌로 덮는 암거(暗渠)가 있다. 몽심재에는 개거와 암거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연못과 바로 연결되는 암거가 인상적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좌측에 있는 수로는 개거였다. 혹여 처음에는 암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풍수지리 이론에서 집 밖으로 나가는 물은 가리는 것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무님은 연못으로 이어지는 암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걱정이라고 말씀하셨다. 암거 바닥으로 물이 새어 연못으로 물이 유입되지 못하고 있으며 새어나간 물이 석축을 무너뜨릴까 걱정하셨다. 사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연못에는 연꽃을 키우고 있었다. 연못이 사각이니 가운데 둥그런 동산이 있을 것 같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조성된 연못은 천원지방의 사상을 반영해 축조했다. 연못 외각은 땅을 상징해서 네모지게 만들고 연못 안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그런 동산을 만드는데 몽심재의 연못에는 동산이 보이지 않았다. 논산 명재 고택에서 그러한 연못을 볼 수 있다.  고증을 통해 몽심재에도 그러한 동산이 있었다면 복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산 명재고택 앞 연못

연못과 사랑채 사이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석가산(石假山. 감상가치가 있는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산의 형태를 축소시켜 재현한 것으로, 기세를 느낄 수 있고 관상 가치가 있는 화강암을 주로 활용하였다)의 역할을 할 것 같은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다. (물론 석가산은 아니다. 원래 몽심재 터의 주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상의 동물은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에 신성성을 전제한다. 상상의 동물이 아닌 현실의 동물에 신성성을 부여한 것은 학과 거북이이다. 커다란 거북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상서로워 보였다. 거북 바위에는 주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의미 있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한자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거북이를 왼쪽으로 돌아 사랑채 앞에 섰다. 사랑채는 축대를 높이 쌓은 대 위에 건립되었다. 전라도 지방의 한옥은 대체로 기단이 낮은데 몽심재는 기단이 높았다. 지형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기단이 높은 탓에 통풍이 잘되고 습기로부터 집이 보호되어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은 자연환경보다도 사람에 의해 무너지는 법. 이런 고택이 오랫동안 남는 것은 이웃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구례 운조루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이 몽심재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이다. 1874년 한옥처럼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나 후퇴가 한 칸이 넘기 때문에 두 칸 반으로 본다. 높은 기단 위의 사랑채는 청학처럼 보였다. 날아가는 청학이 아닌 두 날개를 우아하게 접으며 땅에 내려앉는 청학의 모습이었다. 청학과 바위가 마주보고 있었다.

몽심재가 있는 남원은 구례, 순천 지역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다 보니 몽심재는 자연스럽게  구례, 순천 쪽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의 단골 사랑채였다. 전라도뿐 아니라 함양 쪽에서 넘어오는 영남 선비들도 남원을 거쳐서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가는 길에 몽심재에 머물렀다. 대접이 후해 부담 없이 들렀다. 수없이 많은 선비들이 이 몽심재 사랑채에서 유숙하며 북쪽으로는 등과의 꿈을 펼치고 남쪽으로는 선정을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선은 비단 양반, 선비에게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사랑채에서 특별한 것은 기둥이 팔각기둥이라는 점이었다. 개평마을의 일두 고택은 사랑채의 누하주만이 팔각이었으나 몽심재의 사랑채는 전면 기둥 전체가 팔각기둥이었다.

일두고택 사랑채 누하주

기둥을 팔각으로 만든 것은 일행과 교무님은 주역의 8괘 사상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았다. 8 괘는 하늘[天]·땅[地]·우뢰[雷]·바람[風]·물[水]·불[火]·산·연못[澤]의 8가지 자연현상을 상징하며, 8괘의 2괘씩(가령 건·곤)은 서로 대립된다. 음(--)과 양(―)이 8괘의 근본인데, 음양의 결합·교감함에 의해 만물이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집을 지을 때 사상과 가치관을 반영해서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팔각 기둥을 써서 가치관을 드러낸 고택은 없다.

주역이나 사상, 가치관을 떠나서 8각의 기둥, 둥그런 굴도리, 주두와 소로를 넣어 만든 250년 전의 고택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앉아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마루는 누마루, 툇마루, 쪽마루가 모두 있었다. 특히 쪽마루를 받치고 있는 곱게 휘어진 작은 기둥이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마루를 좋아해서 한참 동안 사랑채 마루에 앉아 건너편 솔숲을 바라보았다. 이 마루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세상을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교무님은 우리 동선을 고려하시며 사랑채와 안채의 방문을 열어 놓으셨다. 편하게 고택 내외를 볼 수 있었다. 안채에서 만난 교무님은 한옥 보는 눈과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그랬다며 오랜만에 사랑채와 안채의 내부를 공개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랑채 가장 우측 방은 예불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옆으로 누운 들보의 곡선이 참 좋아 보였다. 나도 그와 비슷한 관점으로 한옥을 보고 있었다. 몽심재를 자꾸 일두 고택과 비교하게 되었다. 일행은 집을 비교해서 보는 것은 좋은 것이라 말씀해 주셨다.

일두고택 사랑채

사랑채 우측 중문채를 지나 안채로 향했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높은 터전에 ㄷ자 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정읍의 김명관 고택 안채와 구조가 비슷했다. 무엇이 더 낫고 부족하고를 떠나서 김명관 고택은 그것대로, 몽심재는 또 그것대로 아름다웠다. 다만 교무님이 숙식을 하며 집을 관리하는 탓인지 몽심재는 온기가 있었다. 사람이 살며 머무는 집은 마음까지 따뜻하게 했다.

 

교무님의 배려로 안채 내부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정면 가운데 칸 왼쪽은 방이었고, 오른쪽 두 칸은 대청이었다. 대청 오른쪽의 날개에 해당하는 곳(위 사진)의 안쪽은 일층, 밖은 이층의 구조인데 아래층은 아궁이 위층은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날개에 해당하는 곳의 방과 다락이 참 아늑했다. 좁다가 아니라 아늑했다.

안방의 대들보도 참 특별해 보였다. 원목의 굴곡진 곡선을 살리되 둥근 모서리를 각지게 접어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대들보가 묘한 아름다움을 주었다.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의 앙증맞은 문들과 대들보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의 경지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다.  

250년의 세월을 마루는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루의 앞판은 안주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고, 뒤판은 목수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방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1841년의 묵은집과 1893 동학집에서 보았던 이중서까래(?)를 몽심재의 안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측은 묵은집(1841)의 안방 상부 우측은 동학집(1893)의 안방 상부.

장연과 단연이 아닌 반자 위의 서까래가 두 겹인 것이다. 높이가 다른 두 개의 종도리 중 높은 종도리(집의 중심에 놓인 종도리)에 걸리는 서까래는 집 앞 뒤의 도리에 걸친다. 일반적인 한옥과 같다. 낮은 종도리(안방의 중심에 놓인 종도리)에도 서까래가 걸리는 데 이는 마당 방향 상인방 위에 걸린다. 이렇게 이중으로 서까래를 거는 것은 품이 더 들고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방법이었을 텐데....... 지역적 특징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지난번에 이런 구조는 난방과 냉방 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서까래가 두 겹이니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더 따뜻했을 것이다. 묵은집과 동학집을 해체할 때 그는 이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나도 동의했었다. 그런데 몽심재 안방의 이중 서까래를 보면서 문득 '대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삼량 구조로 지어진 측면 한 칸 반의 전툇집에서 세로로 봤을 때 집의 중심과 방의 중심은 다르다. 전퇴가 있기 때문이다. 집의 중심은 방의 중심에서 전퇴 쪽으로 이동한다. 만약 반자를 하지 않고 천정을 노출하면 이 경우 노출된 서까래의 길이 차이로 인해 천정이 비대칭 구조로 보여 예쁘지 않으며 불안감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따로 방의 중심이 되는 공간에 동자주를 세우고 서까래를 더해 천정을 대칭으로 만들어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천정의 대칭을 확보하고 난방 수준도 더 높이는 것이다. 다른 공간은 누울 일이 없거나, 전퇴의 마루가 없거나, 측면이 날개 칸이기 때문에(맞배구조) 이런 구조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와 함께 한옥을 본 세월이 길어지니 나 또한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왜 이런 짓을, 할 일 없이 이런 생각을 하나 했다. 그러데 경험을 하고 보니 이러한 과정은 수수께끼를 해결할 때처럼 즐거움이 있었고, 문화재와 고택을 좀 더 꼼꼼히, 즐겁게 보게되는 장점이 있었다. 


안채의 안마당 정 중앙에는 네모난 돌확이 놓여 있었다. 일행 분과 교무님의 집의 기운과 관련지어서 이 돌확을 이해했으나 나는 그 기운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연못과 마찬가지로 천원지방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교무님은 몽심재의 기운이 아주 세어서 어떤 사람들은 대문을 들어서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기운을 잘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 재주를 풀어내면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다는 말도 더했다. 나는 기운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몽심재에 머물렀던 4 시간 동안 지극히 즐거웠고, 오히려 기운을 얻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채의 서쪽 면에는 김명관 고택과 마찬가지로 안주인들이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피해 편하게 쉴 수 있는 뒷마루가 있었다. 안주인에 대한 배려심이 보였다. 사랑채는 사랑채다웠고 안채는 안채다웠다.

그런데 몽심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연못에도, 사랑채에도, 안채에도 있지 않았다. 헛간에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헛간에 보관된 물건들에 있었다. 그리고 거북 바위에 새겨진 네 글자, 주인의 마음에 있었다.


몽심재의 주인들은 부자 중에 부자였다. 선대부터 근검절약하여 모은 재산이 박비랑 대에 이르러 드디어 만석이 되었다. 박비랑은 남원의 3대 만석꾼에 꼽힌다. 이때가 몽심재 인심의 절정기였다. 그의 땅은 구례 산동까지 뻗어 있었고, 추수기에 쌀을 저장하는 쌀 창고는 구례의 이평과 산동, 남원 읍내 3군데에 있었다고 한다. 남원 수지면에서 곡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부분의 농토가 몽심재 주인의 소유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남원에서 곡성을 갈 때 이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성의 김개남 장군이 이끌었던 동학군을 이겨냈고, 강점기를 이겨냈고, 6.25와 산업화를 이겨냈다는 것은 그만큼 몽심재 주인의 마음 씀이 여느 부자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 증거가 헛간채에 보관되어 있는 쌀 가마니(?)이다.

볏짚이 아닌 갈대로 짠 쌀 가마니(?)는 대여섯 가마니의 쌀을 보관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다. 몽심재의 주인은 이 가마니에 쌀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 쌀이 떨어지면 마음 것 퍼갈 수 있게 했다.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가 몽심재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다. 나아가 더 넓은 마음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고 있었다. 쌀가마니의 넉넉한 품과 입구가 아니라 쌀 가마니가 놓였던 위치 때문이다.

구례 운조루 목독

이 쌀가마니는 원래 몽심재의 대문간 옆 행랑채에 있었다. 이 가마니가 만약 사랑채 옆 곳간채에 있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기 퍽 불편했을 것이다. 바깥주인과 안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쌀 가마니가 대문 옆 행랑채에 놓여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쌀을 편하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큰 부자는 고을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데 몽심재의 주인이 그랬던 것이다. 문장이 부족해 그 마음을 표현자지 못해 아쉽다.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쌀가마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박비랑은 1923년 사재를 털어 몽심재의 안산 청룡자락 뒤편에 수지초등학교 (당시 수지보통학교)를 건립하였고, 이어 수지중학교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후에 국가에 헌납하였다. 강점기에 학교를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 배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의식은 배움을 통해서 생기고, 글을 통해 구체화 되며, 행동을 통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해체해서 보관하고 있는 묵은집(1841)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문득 겹쳐졌다.

그가 해체해서 보관하고 있는 1841-N 년에 지어진 민가.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은 비단 쌀 가마니와 학교 건립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거북 바위에 새겨진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靡他其迪 미타기적'

(미-쓰러지다 문지르다)-이 한자는 '쓰러지다'란 뜻 보다는 '아름답다', 혹은 아름다워서 '어루만지고 싶다'라는 뜻이 적절하다. 아닐 비(非) 자 부수에 삼 마(麻)를 쓰니 삼베가 아닌 것, 즉 비단을 의미한다. 비단은 아름다운 것이고 어루만지고 싶은 것이다.

(타-다르다)-타인. 다른 사람을 의미한다.

(기-지시대명사 그)-그것

(적-나아가다. 적절하다)-옳다, 적절하다는 뜻이다.

이를 연결지어서 풀어보면 '다른 사람을 어엿비 여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옳은 것'이란 뜻이 된다. 다른 사람을 아끼고 아름답게 여기며 여엿비 여기겠다는 마음을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연못에서 물을 통해 선비의 마음을 길러 이 바위의 세겨진 문장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대대로 전승되고 실현된다. 대표적인 분이 원불교 박청수 교무님이다.(참고로 저는 원불교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몽심재의 후손인 원불교의 박청수 교무님의 삶에서도 그 가치관의 전승을 확인할 수 있다. 몽심재에서는 약 40 명의 원불교 교무님이 배출되었다. 배출된 교무님들 중 서타원(誓陀圓) 박청수(朴淸秀) 교무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의 원불교 여자교무 복장을 하고 전 세계의 어려운 현장을 보살피고 다니셨다. 그녀가 가는 어려운 곳마다 한국의 따뜻한 인정이 전해진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한국의 마더 테레사’다. 그녀는 지난 20여 년간 국경, 인종, 이념, 종교를 초월하여 세계 50개국을 대상으로 무지와 빈곤, 질병 퇴치에 힘끄셨다. 오랜 내전으로 지뢰가 많이 묻힌 캄보디아에는 지뢰 제거를 위해 영국의 할로재단을 통해 미화 11만달러 지원했는데, 이 일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지뢰를 제거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교무님은 인도에 ‘마더 박청수기념자선재단’을 설립하고, 50병 상의 종합병원 ‘마하보디마더박청수자비병원’도 설립하였는데 이 병원은 히말라야 라닥뿐만 아니라 인도 카슈미르주 전체를 통해 최초로 민간인이 세운 병원이다. 그런가 하면 캄보디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 고사난다 스님을 통해 담마 예트라 평화운동을 지원하셨다. 킬링필드로 지식인들이 희생되어 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부족하자 단기교사 양성기금을 지원하기도 하셨다. 선대의 삶과 가치관이 후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실천되었던 것이다.

곳간채에는 쌀 가마니뿐만 아니라 몽심재의 주인들이 사용했던 여러 살림 도구들도 보관되어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삿갓이었다. 연필심만큼 곱게 고른 대나무로 짠 삿갓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삿갓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교무님은 몽심재의 옛 주인 중에 한 분이 사헌부 감찰을 했었는데 그때 사용했던 삿갓이 아닐까 생각하셨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혹여 먼길을 여행할 때도 나를 숨길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를 숨기는 것과 감찰이 맥이 닿아 있어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을 듯했다. 이것 이외에도 공개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물건들이 몽심재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몽심재에 대한 지자체와 문화재청의 관리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가지정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지자체의 관심과 문화재청의 관리가 좋지 않았다. 하물며 몽심재가 이러는데 다른 문화재급 고택 그리고 관심 밖의 민가들의 관리는 어떨까 싶었다.

그 첫째 증거가 몽심재의 헛간채였다. 몽심재의 헛간채는 얼마 전에 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이 전체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너져 가는 집을 하도 많이 봐서 잘 아는데 이 집은 단 한 번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무게 중심이 더 쏠리면 순간 한 번에 넘어갈 위험이 높아 보였다. 기와를 올려서이거나, 기와를 잘못 올려서인 것 같았다.

앞쪽 기둥들이 이미 들려 있었으며 인방재와 벽의 틈이 많이 벌어져 있었다. 교무님의 말로는 문선 위 벽의 금도 올봄에 더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유물이 보관되어 있던 곳간 채도 후면의 벽은 상태가 좋지 않았고 하방 벽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보수를 했음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고택을 보수하면서 벽에 시멘트를 꼭 발라었어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위 사진의 벽도 시멘트였고 사랑채의 측면 벽도 시멘트였다. 그가 진안 서이당을 보수할 때도 회와 수사, 우뭇가사리를 삶은 물을 섞어 미장을 했는데 250년 된 고택을, 선비 정신을 대대로 실천했던 몽심재를 시멘트로 발라 보수를 했던 것이다. 이런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시설도 가급적 고택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며 설치해야 한다. 따로 배전실을 만들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한쪽에 설치해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없었다. 물론 이것이 문화재청과 남원시의 잘못만이었겠는가. 누구보다 공사를 시행한 사람이 잘못이 크겠지만 이를 감독하고 관리해야 할 관청의 잘못도 무시할 수 없다. 미리 수리 보수 가이드라인을 만들거나 고택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이 공사를 관리 감독하게 했어야 한다.  

그리고 대문 앞 디딤돌이었다. 말에 오를 때 하인의 등을 밟고 오르지 않기 위해 놓은 돌. 하인에 대한 배려가 담긴 돌에 이렇게 아스팔트를 발랐어야 하는 것일까. 돌이 기름을 먹어 원형을 잃을 터인데.

끝으로 안타까운 것이 고택을 관리하는 교무님에 대한처우였다. 한 달에 고택 관리비로 받는 돈이 45만 원이라고 한다. 전기세며 휴지 값, 각종 공과금을 납부하면 돈이 부족하다고 한다. 올봄에는 홍매화가 너무도 심고 싶으셔서 사비를 들여 홍매화 8주를 사서 심으셨다고 한다.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관람객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서 국화를 얻어와 삽목도 했다고 한다. 안타깝기 끝이 없었다. 무얼 먹고 사시나........


개인적으로 남원시와 문화재청에 조언을 해드리고 싶다. 남원 예촌 건축비에 사용된 272억, 그리고 근래 지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간 비용 수십억의 일부를 몽심재를 비롯한 고택에 투자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문화재청은 사라지는 민가나 고택을 찾아내 보호했으면 좋겠다. 새로 지은 건물에는 편리함은 있으나 역사가 없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몽심재, 그 유물이 오롯이 남아 있고, 찾으면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고택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몽심재는 원불교의 소유이니 원불교가 관리 주체이고, 다른 고택은 개인이 소유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는 누구의 소유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나 같으면 몽심재의 대문 옆 옛 행랑채 자리에 새롭게 한옥을 지어 원불교에 희사해서 법당 및 박물관, 몽심재 관리실로 활용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몽심재 내부의 원불교와 관련된 법당이며 물건들을 옮기고, 공개해서 관람객들이 종교적인 부담이 없이 몽심재를 즐기게 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집은 사람이 머물러야 오래가기 때문에 잠시 머물 수 있게 하거나 전통문화 공연장 등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힘들면 관리비라도 많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디어를 이용 하시라. 몽심재는 그럴 가치가 있는 고택이다. 건축물뿐만 아니라 그 집에 대대로 흐른 정신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이 매거진의 주인공인 '그' 하는 일을 직접 해야 한다. 사라질 위기, 빈집 철거 지원사업으로 사라질 위기 있었던 민가들,  예컨대 1841년의 민가 두 채, 1893년 동학 혁명 시대에 지어진 고택, 1874년에 지어진 7칸 고택, 그리고 1928년의 6칸 겹집의 김제 고택, 1928년에 지어진 집과 형제의 집이며 같은 목수가 지은 1933년의 김제 고택, 1954 장수 식천리 민가, 1933에 지어진 임실 학당.  1852에 지어진 장수 고지대의 초가 삼 칸 민가들을 그가 지켰던 것처럼 민가 보존 사업을 문화재청에서 해야 한다. 민중의 삶도 소중하다는 사실, 미시사가 없으면 거시사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민중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는 민가를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강점기 때 만들어진 근대문화재보다도 강점기 이전에 지어진 민가 한옥의 보호가 먼저이고 더 시급하다. 그리고 이는 멀리 보면 그것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며, 개개인의 문화재를 보는 시선과 마음을 전환할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민가 한옥은 내가, 내 부모, 내 이웃이 살았던 집이고 그것을 국가에서 보호한다면 그 파장이 전 국민에게 미처 문화재를 보는 시선과 관점, 행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지킬 수 있다. 파급력. 사라지면 안 될 것들은 지켜야 한다.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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