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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Jul 25.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21

오래된 빈집을 바라보며

국민학교를 막 입학했거나 입학을 앞둔 나이였을 것이다. 작은아버지 댁에 사셨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같은 마을에 살았지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사소한 실수로 할머니에게 혼난 기억이 하나 있으나 애써 더듬어보고 싶지 않다. 부모님과 함께 할머니의 상례 과정을 함께했지만 사람들, 냄새와 소리,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다. 노력한 적도 없다. 그런데 오늘 문득 할머니 상례의 첫날밤이 기억난다. 문상객들도 모두 돌아간 아주 늦은 시간, 부모님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쪽잠을 주무시고 새벽에 작은아버지 댁으로 갈 계획이셨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잠자리를 마루에 살피셨다. 고랭지의 가을밤이었는데. 부부는 바닥에 요도 깔지 않고 마루에 홑이불 하나만으로 잠을 청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홑이불도 청하지 않으셨을지 모른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지금은 알 것도 같다.

그때, 부모님과 내가 누웠던 마루는 차가웠지만 따뜻했다. 어머니의 온기에 따뜻했고 아버지의 슬픔에 차가웠다. 부모 잃은 자식의 불효에 차가웠고, 그 불효 때문에 불편한 잠자리를 청한 도리에 따뜻했다. 그 차갑고도 따뜻했던 마루가 기억 속의 첫 마루이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고, 모깃불을 피우고 가족 모두가 그 마루에 앉았던 때는 더 오래되었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돼지 내장을 소금으로 씻고 한댓 부엌에서 삶아 식구들 입에 넣어 주었던 어머니도, 그 옆에서 모깃불을 피우셨던 아버지도 돌아가신 지 오래. 무언가 허전해서 자꾸 그때 기억, 그 기억이 만들어진 초가집을 떠올려 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기억을 저장할 틈 없이 빠르게 달렸고 너무 먼 곳에 서있다. 혹여 우리 집이 남아 있다면 추억을 떠올리기가 쉬울 텐데, 오감의 기억을 온전히 뽑아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집도 터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오늘 본 빈집의 주인은 집이 사라지면 추억과 역사, 감각과 기억이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밭 한가운데 옛집을 남겨 놓았는지 모른다. 허리를 펼 때마다 집을 바라보며 추억 한 조각을 먹고, 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지난 가계를 더듬어 볼지 모른다. 집주인, 혹은 집주인이었던 선대의 한 분은 그런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보다도 마루 귀틀을 괸 돌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것 같은 집, 아니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것 같은 초가집, 초가로 만들어져 민중들이 살았던 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을 것 같은 집. 오늘 우연히 그런 집을 발견했다. 밭 가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름 낮 오후 2시이니 밭주인이 나타날 리 없었다. 한참을 서성거리다 무례하게 밭을 건너가 집을 사진에 담았다.  나는 왜 이 집을 사진에 담고 싶었을까. 슬레이트 지붕이었고 멀리서 봤을 때 특별함이 없었던 집이었는데...... 삼 칸 집이어서, 소매 인방이 없어서, 오른쪽 사랑방의 작은 문 때문에...... 명확한이유는 그 옛날 우리 집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엄마' 하고 부르면 '아이고 인제사 온가!'라는 말이 먼저 마중 나올 것만 같았다.



옛집은 디테일에 아름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사진에 그저 집의 분위기를 담고 싶었다. 집의 여러 곳을 찍어 가끔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었다. 그런데 집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집을 지은 목수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해체해서 보관하고 있는 묵은집(1841)보다 더 오래된 초가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상량문을 보지도 못했고 '그'만큼 옛집을 보지도, 옛집을 연구해 본 적도 없지만 왠지 무척 오래된 집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집의 디테일한 여러 곳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것이어서 특히 옛집은 더욱 차이가 커서 조심스럽지만 나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 아름다운 느낌의 근거, 근거가 있다면.... 느낌의 근거.... 느낌에 근거라..... 그럼에도 첫째 이유는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보아지와 장여를 받치고 있는 장여 받침 때문이었다.

전면 왼쪽 칸은 부엌이었고, 오른쪽 칸은 사랑방이었다. 가운데 칸의 앞쪽은 툇마루 뒤는 방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전라북도 동부 산간의 초가 삼 칸 집이었다. 민도리집(한옥 나무 구조에서 도리와 장여로만 꾸며진 가장 간단한 구조의 집)이었으나 장여조차도 부엌과 툇마루 상부에만 설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장여를 받치고 있는 장여 받침이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꽤 오래되어 보였고 모양이 특별해 보였다. 장여 받침은 의장적 요소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장여와 보아지 맞춤이 부실한 경우 구조 보강을 위해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삼 칸 초가집이니 구조 보강을 위해 장여 받침이 사용되었겠지만 그 마지막 다듬에 정성이 꽤 들어가 있었고 모양 또한 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구조 보강을 위해서였다면 그 끝을 다듬을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무심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계산하고 정성껏 다듬은 장여 받침이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고, 아무렇지 않게 곡선을 잡아 편하게 만들어낸 항아리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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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여 받침만이 아니라 보아지(기둥과 보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을 보강해 주는 건축 부재. 기둥과 보가 연결될 때는 항상 직각으로 만나기 때문에 그 직각되는 부분에 끼워서, 보나 기둥에 횡력(橫力)이 작용하였을 때, 변형을 방지하는 구실을 한다) 끝을 적당하게 말아낸 모양도 인상 깊었다. 전면의 보아지는 그 끝을 모서리지게 만들어 장여 받침과 대비를 이루게 했고, 후면의 보아지는 그 끝을 둥글게 말아 전면의 보아지와 구분을 하면서 그것대로 다른 맛을 주었다.  

둘째는 부엌문이 있었던 자리의 둔테였다. 둔테는 대문 등 판재로 된 넓은 문을 좌우의 문선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인방이나 문선에 기대어 파놓은 음장부, 즉 구멍을 말한다. 철물이 많이 쓰이면서 이 둔테는 돌쩌귀로 발전하는데 문둔테는 암돌쩌귀로 변했다. 또 문을 잠그기 위하여 빗장을 걸기 위한 구멍을 빗장둔테라고 한다. 이 집의 부엌문의 둔테도 묵은집(1841)과 마찬가지로 큰 통나무를 자귀로 다듬어 만든듯했다. 한 가지 더 특별한 것은  문둔테뿐만 아니라 빗장둔테도 큰 통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부엌문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부엌의 벽은 판벽으로 만들어졌고 그 끼워 맞춤 솜씨가 좋아서 부엌문 또한 예사롭지 않을 듯했으나 문의 자취는 없었다. 퍽 아쉬웠다.

아주 오랜 세월을 둔테는 담고 있었다. 세월뿐만 아니라 목수의 자귀 자국, 끌 자국, 톱 자국을 둔테와 부엌의 판벽은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 부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들은 이 문을 넘나들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음식으로 아이들과 서방님을 살찌웠을 것이다. 딸들에게는 당신이 배운 음식 솜씨를 전해주었을 것이고, 그 솜씨는 세상으로 퍼져 우리 몸에 기억되었을 것이다.   

부엌 내부에도 이 집이 오랜 역사를 드러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까래의 연침이었다.(연침에 관련된 내용은 앞서 많은 설명이 있었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연침의 모양은 묵은집(1841)처럼 육각이 아닌 동학집(1893)처럼 원형이었다. 연침만으로 이 집은 개화기 이전에 지어진 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개화기도 이르다. 길게 나온 도리에 추녀와 서까래가 걸려 있었으나 그 위의 산자와 알매흙, 치받이 흙이 떨어져나가 서까래의 연침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부엌 천정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산자와 흙이 사라진 이유를 생각했다. 아마도 슬레이트 지붕을 설치하며 그것들을 제거한 듯했다. 부엌은 난방에 크게 유의하지 않아도 되니 60, 70년대 지붕을 슬레이트로 교체하면서 산자와 흙을 제거한 듯했다. 연침을 볼 수 있어서 좋았으나 슬레이트가 깨지거나 벌어지면 이 집은 더 쉽게 훼손될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떤 형태이든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더불어 서까래가 생각보다 굵었다. 크기를 재보지는 않았지만 여느 초가삼간보다 서까래가 굵었다.

이어서 부엌 뒷벽과 우측 측면 벽에 튀어나온 시렁이 보였다. 동학집(1893)에서도 이렇게 시렁이 벽을 넘어 튀어나와 있었고 우리는 이를 목수의 무던함을 칭찬했던 계기로 삼았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벽 면에 맞춰 잘랐을 나무를 남겨 놓은 것을 무던함과 여유의 한 단면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는 무던함이 아니라 실용성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읽은 김광언 교수의 '우리네 옛 살림집'이란 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옛집들은, 옛 목수들은 부재 사용 목적이 분명했고 집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실용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좌측 사진은 그가 해체해 보관 중인 1874년 가옥의 우측면. 우측 사진은 동학집의 후면.

실용성과 아름다움의 조화는 노출된 시렁뿐만이 아니었다. 하인방과 문설주의 맞춤, 그리고 벽선과 인방재의 맞춤에서도 목수의 정성과 실용성에 대한 고민,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있었다. 초가 삼 칸 집임에도 이 집의 우측면 벽에는 기둥과 맞닿게 벽선을 설치해 지었다. 하인방과 문설주의 맞춤보다도 이 벽선과 인방재의 맞춤이 더 특별해 보였다. 이렇게 견고하게 집을 지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집이 훼손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방재에 홈을 파고 벽선을 그냥 올려도 될 것인데 그 연결된 곳을 마치 나비장과 비슷하게 다듬어서 결구하고 있다는 것이 특별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바늘이 들어갈 틈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하인방과 문설주, 문의 연결된 곳도 벽선과 마찬가지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문의 크기를 감안해서 집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고, 모든 문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계산된, 의도된 집 짓기였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문까지도 집 구조의 일부로 인식했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끝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마루이다. 마루에는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이 올려져 있어 온전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문득문득 드러난 모습을 통해 옛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루가 높아 댓돌의 높이를 올린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고. 귀틀의 자귀 자국이며, 끌 자국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옛 목수들은 이 집 마당에 나무를 모아 놓고 이런 모습으로 귀틀을 만들고, 마루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루에 이 댁의 식구들은 삶을 펼쳤을 것이다. 부모를 잃고는 차마 따뜻한 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이 마루에서 밤을 지새운 날도 있었을 것이고, 시련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아들과 딸에게 '이제 자그라'라고 조용히 말을 건넨 날도 있었을 것이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후루루 국수를 먹었던 날도, 빈 그릇을 앞에 두고 눈을 똥그랗게 뜬 딸을 위해 자신의 국수를 덜어 주었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 온 남편의 죽마고우를 위해 잘 익은 막걸리와 고소한 가죽순 무침을 내놓았던 곳도 이 마루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루에서 백발의 아내에게 '참 잘 살다가오'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집주인은 그 세월을 잊지 않고자, 집이 사라지면 추억과 역사, 감각과 기억이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밭 한가운데 집을 남겨 놓은 것이 아닐까.

부디 이 초가삼간 집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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