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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Sep 16.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25

근대 한옥 1928 (유하당)-4

상량문을 확인하다.

다음 날 새벽 이른 시간에 그는 해체 현장으로 갔다. 일 진척에 대한 궁금함보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집을 지을 때도 해체할 때도 한번 때를 놓치면 그 공정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다. 현장에 도착하니 내부 반자 일부가 제거되어 한옥의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가장 궁금했던 상량기문을 찾아보았다. 우측에서 둘째 칸이 대청이었고 대청 상부에 상량기문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량기문의 기록 방식과 기록된 위치가 다른 집과는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집들은 상량기문을 마룻대(종도리)에 기록을 한다.


보통 민가에서는 종도리에 먹으로 상량 기록을 남기는데 유하당의 경우에는 종도리가 아닌 특별히 조각된 나무에 상량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네모난 틀을 짜서 동자주에 걸고 그 안에 소로와 화반 (화반(華盤) 전통한옥 목조건물에서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나무 위에 놓여, 위의 가구재를 받치는 부재(部材) 화반(華盤) 이란 명칭은 옛날에는 덩굴을 얽히게 한 모양의 부조를 하였고 나중에는 가장자리에 꽃 모양을 새긴 것에서 유래함. 그 장식은 근세에 이를수록 복잡, 섬세하게 조각함)을 연상시키는 나무 장식 주변에 상량기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화반을 연상시키는 장식은 가운데 역삼각형 조각이 있었고 양쪽에 동그란 조각 있었다.  

이 조각의 문양들은 그로 하여금 곡성 성륜사의 비석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그저 문양이 비슷하다는 생각뿐이었으나  이 문양들이 원방각(圓方角) 개념과 닿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는 문득 들었다.

원방각(圓方角) 개념은 선조들의 사상이 반영된 오래된 개념, 문양으로 원(圓)은 하늘을 상징한다. 하늘이란 시간에 제약이 없고 형체가 없는 무형의 세계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이 둥근 원형(●)이다. 모나지 않고 원만하며 막힘이 없는 원형을 통해 하늘을 드러낸다. 방(方)은 네모(■)이며 땅을 의미한다. 땅은 시작과 마침이 있는 유한의 세계이며, 형체가 있는 유형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땅이란 시간과 형체에 제약이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이 네모진 방형(方形)이다. 각(角)은 세모(▲)로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에게는 땅의 성정인 올곧고 반듯함 속에 하늘의 성정인 온전함을 얻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성취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강인함이 중요하다. 그러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뿔 각(角) 개념이 부여된 것이다.

원방각 개념은 한글 창제 원리에서도 나타난다. 한글은 천지인(天·地·人)의 삼재 사상을 토대로 기본 모음(· ㅡ ㅣ)을 만들었고 하늘을 의미하는 둥근 점(·)의 위치에 따라 음(陰)과 양(陽)의 성질을 가진 초출자(ㅗ, ㅏ, ㅜ, ㅓ)를 만들어 냈다. 선의 위나 오른쪽에 점을 찍으면 양(陽)의 기운을 의미하고, 아래나 왼쪽에 찍히면  음(陰)의 기운을 나타낸다. 이 초출자에 다시 둥근 점(·)들 더하여 재출자(ㅛ, ㅑ, ㅠ, ㅕ’)를 만들어 냈다. 한글 또한 천지인(天·地·人), 원방각(圓方角)의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개념은 여러 사물과 건축물에도 반영되었는데 사물로써 대표적인 것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해동통보이고 건축물로는 첨성대가 있다.

숙종 2년에 대각국사 의천이 해동통보의 모양에 대해 “밖의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뜨고, 안의 네모난 것은 땅을 본뜬 것으로, 만물을 하늘이 덮고 땅이 받쳐 사라지지 않는 원리를 구현한다.”라고 설명한다. 첨성대에는 위정자의 하늘에 대한 지향성과 통치 이념을 담아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없이 많은 문양 중에  유하당을 지은 목수, 가주가 네모와 원과 세모를 선택했다는 것은 원방각 개념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는 문득 들었다.

그 문양 주변에 상량기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글자의 상태가 좋지 않고 글자에 개성이 반영되어 있어서 인지 몇몇 글자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형식은 다른 상량문과 비슷했다. 다만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몇몇 글자가 있었다.


淼 龍盤     歲在 戊辰 八月 壹日 開基 二日 安礎 三日 立柱

八日 巳時 上梁 乾坐 格 戊辰 丁巳 甲子 丁卯

子孫 繼承 應天 三光 備人 五福

國士 00 惟0 一基   虎踞 森


묘 용반  세재 무진 팔월 일일 개기 이일 안(?)초 삼일 입주

팔일 사시 상량 건좌 격 무진 정사 갑자 정묘

자손 계승  응천 삼광 비인 오복

국사 00 유0 일기  호거 삼


대략 첫 세 글자는 화재와 재난을 막는 의미의 글자로 보인다. 이어서 무진년(1928년) 팔월 일일 개기(터를 닦고), 다음날 주춧돌을 놓고, 다음날 기둥을 세우고 그 후로 5일 후인 팔일 오전 9시경에 상량을 한듯하다.(1874년 7칸 한옥도 부재가 더 큼에도 불구하고 입주부터 상량까지 2일이 걸렸는데 6 칸집이 5일이 걸렸다는 것은 아마도 상량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이거나 부재를 연결하는 산지를 꽂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음에 나오는 '乾坐'는 서북방향을 뒤로하고 집을 지었다는 의미로 집의 방향이 동남향임을 나타내는 단어로 보인다. 이어서 나온' 戊辰 丁巳 甲子 丁卯'는 잘 모르겠으나 집(상량일)과 가주의 생일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의 기록은 그가 해체해 보관하고 있는 1874년 한옥에서도 볼 수 있었다.

'子孫 繼承'은 아마도 자손으로 이 집이 잘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타내고 '應天 三光 備人 五福'은 복을 기원하는 문장으로 ‘하늘의 해, 달, 별님 감응하시어 인간에게 오복을 내려주세요’  정도가 될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대구로 보이는 문장은'國士 00 惟0 一基'는  다른 상량문에서도 본 적이 없고, 한문에 대한 지식도 부족해서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 끝 세 글자는 첫 세 글자와 마찬가지로 화재와 재난을 막는 액막이 글자로 보인다.


다락방에서 족보와 몇 장의 교지를 발견하다.

내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벽이 헐리고 몇 개의 인방재가 제거되자 실내가 상당히 넓어 보였다. 곡재 들보가 많이 사용되고 목재의 상태가 좋아 이축해 놓으면 참 아름다운 집이 될 듯했다. 고 사장도 이런 집인줄 알았으면 자신이 매입하거나 다른 업자에게 비싼 값에 팔아야 했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그는 그냥 웃기만 했으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일부 카페나 블로그에 이보다 못한 집이 수천 만원에서 억대까지 거래 되는 경우를 보았고 그것을 전문으로 매입해 한옥을 통째로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집을 비롯해서 그가 해체해서 보관하고 있는 조선시대 고택을 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특히 일본에는.....여하튼 고 사장은 일하는 내내 입맛을 다셨다. 유하당에서 특별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면 다락방과 충량이었다. 1874년 한옥의 다락방은 바닥 전체를 마루로 만들었으나 유하당은 흙으로 바닥 처리가 되어있었다.

1874년 한옥의 마루 바닥의 다락
유하당(1928)의 흙 바닥의 다락

측면의 물매를 잡는 충량 또한 달랐는데 1874년 한옥의 경우 휘어진 두개의 곡재를 연달아 이어서 물매를 잡았고 유하당(1928)의 경우 두 개의 충량을 나란히 놓고 그 위에 부재를 쌓아 물매를 잡은 구조였다(그런데 모든 집이 각각의 개성이 있는 것인데 이런 비교가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다만 도편수님들이나 한옥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이 저의 이런 문장과 사진을 통해 어떤 엉뚱한 힌트를 얻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냥 계속 기록을 하기로 했다.)

1874년 한옥의 충량

다락을 둘러보기 위해 오르니 한쪽 구석에 몇 권의 족보와 족보 안에 몇 장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한동안 이 집에 세 들어 살았다가 이사를 간 사람이 남겨 놓은 것인 듯했다. 족보와 문서는 세 들어 살았던 사람이 이 집의 후손이 아니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놓고 간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전주 최 씨 문중의 족보와 고종황제가 내려준 교지같아 보였다.

 

교지에 기록된 년도는 광무 6년부터 10년으로 1902년부터 1906년까지 기간이었고, 관직을 하사한 내용으로 보였다. 고종은 재위 기간동안 궁궐 건축 등에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명예 관직을 내렸다. 물론 명예 관직이 아닐 수도 있다. 그가 처음에 이것을 발견했을 때는 무척 놀랍고 신기했고 귀한 것을 얻은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런 감정은 사라졌다. 자신의 조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안 족보였거나 그의 조상이 받은 교지라면 의미가 있어 보관하거나 표구를 해서 자랑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랑하는 것이 그에게도 이 교지를 하사 받은 분의 자손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때가 오면 인연이 닿은 전주 최 씨 문중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게 된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진 탓에 고 사장과 조 목수를 만나지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해체공사 2일째 날이 밝았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재미없는 매거진을 읽고 계신 독자 분들은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천'의 장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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