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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Sep 11.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24

근대 한옥 1928 (유하당)-3

다음 날 그는 아침 일찍 해체 현장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고유제를 지내고 일을 시작했다. 고 사장과 조 목수, 몇 사람의 일용직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천정 반자와 벽지 등을 제거했다. 반자를 제거하고 집 내부 구조를 보니 가구 형식은 이고주 오량집이었다. 가구는 건물의 뼈대, 골조를 말한다. 건물의 뼈대를 짜 맞추는 법식을 가구 형식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한옥의 가구는 건물의 종단면을 기준으로 건물의 층수, 고주(높은 기둥)와 평주(낮은 기둥)의 수와 위치, 도리(량-서까래를 받치기는 기둥과 기둥을 사이에 놓는 나무)의 수 등으로 분류한다. 보통 2고주 5량, 1고주 7량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알기 위해 사용하는 구분법이다.

1고주 7량 구조의 맞배집으로는 전북 장수군에 있는 장수향교 대성전이 대표적이다. 측면에서 봤을 때는 2 고주이지만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집안의 칸을 막지 않아, 두 칸 이상이 하나로 통하는 것) 구조여서 1 고주 7량 구조이다. 배향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내부를 통간 구조로 만든 듯했다. 넓은 공간을 얻기 위해 튼튼하고 긴 대들보가 필요했을 것이다.

장수향교 대성전의 가구 조감도
장수 향교 대성전 전면
장수 향교 대성전 내부- 7량의 통간 구조로 고주가 없다.

장수 향교는 선창리라는 마을에 1407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땅이 습해 주춧돌의 침하가 발생하고 목재가 상해 1686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축을 했다. 1681년 숙종에게 이축 윤허를 받고도 1686년에 이축이 이루어진 데는 사연이 있었다. 이축을 위한 공사 대금이 필요했으나 장수가 워낙 궁벽한 곳이라 관아에 공사비가 없었다. 당시 현감이었던 이선연은 자신의 녹봉(월급)을 모아 윤허 4년 후인 1685년 3월에 공사를 시작해 1686년 2월에 이축을 완료한다. 이선연과 같은 원님이 있었기에 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시대의 원님들이 개발이라는 목적 때문에 사라져서는 안 될 한옥과 근대문화재를 훼손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장수 향교 대성전 내부

크레인도 없었던 시대에 이처럼 크고 웅장한 건물,  기둥과 대들보를 옮기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울력을 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그와 차행의 선대 할아버지도 계셨을 것이다. 그 선대 할아버지들의 향교와의 인연은 그와 그의 친구 차행에게도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 그들이 국민(초등) 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학교에 가기 싫었던 두 착한 어린이는 등굣길에 학교에 가지 않고 이 향교에 숨어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다부지게 인사하고 집에서 나와 학교에는 가지 않고 이 향교에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벌써 학교 '쨌'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바둑아 안녕, 영희야 안녕', '1+1=2' 등의 현대식 교육보다는 '위기지학'이나 '격물치지' 등의 전통 사상과 '시서화문사철' 등 인문학을 배우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더 나아가 선대 할아버지들의 손길을 느끼고, 뜻을 배우고 , 그것들을 갈고닦아 나라의 동량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 깊은 뜻을 모르고 다만 학교에 오기 싫어 그랬다고 어린이에게 모진 매질을 했던 수십 년 전 이름 모를 선생님은 반성하셔야 한다. 여하튼 그 모진 매질 이후에 그들은 향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를 잠깐 들린 후에 오락실을 다니거나 뱀을 잡으러 다녔다. 서른을 넘기고 옛 추억이 떠올라 자주 향교의 홍살문을 넘었다. 그리고도 십몇 년 동안 향교에는 갔으나 대성전 내부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는데..... 며칠 전 장수 향교 문화해설사 님의 도움으로 내부를 보게 된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7량의 가구 구조를 보게 된다. (물론 과거에도 본 적이 있겠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처음 본 것으로 하자) 웅장하고 아름다운 내부 모습도 모습이지만 이것을 후대에게 남겨주기 위해 녹봉을 모으고, 이축 과정에서 고통을 참았던 선대 할아버지의 마음과 노력이 애틋했다.

장수 향교 명륜당
장수 향교 명륜당 전면

장수 향교에 대해서는 왜놈들로부터 향교를 보호한 정경손이나 대성전에 의해 그 아름다움이 가려진 명륜당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오늘은 1928년 유하당(이제부터는 이 근대 한옥을 '유하당-流河堂'이라 칭하기로 하자)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에 인연인 된다면 무성서원 등과 비교하면서 조선시대 교육기관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유하당 해체 공사로 돌아와서.... 6칸 겹집의 유하당은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고 뒤쪽에 방을 하나 더 연결했다.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두 개의 높은기둥을 사용했으니 2 고주 5량(종단면의 도리가 다섯 개) 집이었다.

유하당 후면 툇보
유하당 후면 툇보

서까래는 위쪽에는 짧은 단연이 걸리고, 아래에는 긴 장연이 걸려 있었다. 서까래는 굵지 않았다. 아니 얇았다. 서까래가 얇은 이유를 조 목수와 고 사장은 초가를 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조 목수를 비롯해서 고 사장도 유하당의 처음 지붕을 초가라고 생각했다. 지금 기와가 올려져 있으니 처음에도 기와를 올렸을 것이라고 그는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그 두 사람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 주장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통 맞배집을 제외한 보통 한옥 귀퉁이의 추녀는 서까래에 비해 앞으로 나오고 위로 솟아서 처마의 곡선을 만든다. 추녀가 서까래보다 앞으로 나와 있으니 처마는 안쪽으로 곡선을 이루고, 위로 솟아 있으니 처마는 아래로 곡선을 이룬다. 각각 안허리곡과 안곡이다. 즉 안허리곡은 건물을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추녀와 추녀의 돌출된 끝을 연결한 직선으로부터 안쪽으로 들어간 곡선을 말하고, 앙곡은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처마와 처마를 연결한 직선으로부터 아래로 처진 곡선을 말한다. 그런데 유하당의 처마선은 안허리곡이나 앙곡이 없이 반듯하게 수평을 이룬다.

유하당 전면-선이 반듯한 처마이다.

조 목수와 고 사장님의 의견에 그의 의견을 더해 정리하면 첫째는 그냥 멋을 부리지 않은 것이다. 궁궐이나 높은 벼슬의 양반집도 아니고 관공서나 절이 아니기 때문에 유려한 곡선을 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체 높은 벼슬을 한 양반집이었다면 안허리곡과 앙곡을 많이 주어 멋을 부리고 사회적 위상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신분의 위계질서보다는 자본에 의한 위계 질서가 우선인 강점기였다. 더욱이 집주인이 부자이긴 했지만 마을에서 평생 땅을 일구며 산 농부 혹은 지주이기 때문에 유려한 처마선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장수사 일주문

둘째는 유하당을 지은 목수가 궁궐이나 절 등을 짓는 도편수가 아니라 김제 지역에서 민가를 짓는 솜씨 좋은 평범한 목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집과 비슷한 집, 비슷한 시기에 지은 집들을 가까운 곳에서 있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집들은 모두 유하당처럼 처마선이 수평이었다. 기법이나 구조, 시대 등을 비교해 보면 같은 목수이거나 같은 목수 집안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시골에서 집을 짓는 평범한 목수였기 때문에 건축 기술의 특성 혹은 한계로 인해 궁궐이나 사대부가처럼 유려한 곡선의 처마선을 만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33년에 지어진 한옥의 반듯한 처마
1933년에 지어진 근대 한옥 소로 수장이 보인다.

셋째는 강점기 일본 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강점기 때 지어진 군산 신흥동의 히로쓰 가옥이나, 같은 시기에 지어진 진안 마령면 강정리 전영표 가옥, 임실 삼계면의 삼 칸 가옥, 전북 장수 식천리의 사 칸 집을 보면 서이당처럼 처마에 곡선을 주지 않고 반듯한 수평으로 처마선을 마무리했다.

진안 강정리 근대 한옥(1924)-처마선이 반듯하다.
임실군 이인리 근대 한옥(1939)-처마선이 반듯하다.

이런 일본집 처마 곡선과 한옥 처마의 곡선 차이는 배희한 목수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집을 짓는 것은 '이렇게 줄을 띄서, 왜말루는 마쓰구닐이라구 조선말루는 곧게 허는 거지, 꼿꼿허게' 허지만 이 조선집은 이렇게 들려 올라가야 해. 들려 올라갈 뿐 아니라 또 이렇게 차차 버드러져야 해. 버드러지는 거는 추녀를 짓는 거지. 둥그스럼하게 올라가구 또 이렇게 버드러져야 한단 말이야’ -이제 이 조선의 톱에도 녹이 슬었네. 배희한. 뿌리깊은 나무.p86


유하당 또한 1928년도에 지어졌으니 유이당을 지은 목수는 강점기쯤 목수 일을 배웠을 것이고 그 배운 솜씨가 유하당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한옥을 짓는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방식과 근간은 지키되 시대적 특징과 목수의 개성을 반영해서 처마선을 결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유하당의 지붕을 제거하고 가운데 칸의 들보와 뒤쪽의 퇴보, 좌우의 측면의 충량을 보면 초가집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곳에 사용된 보들은 하나같이 모두 휘어진 보였고 크기가 제법 컸다. 이렇게 휜 것만 사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두 휘어진 나무였고, 나무는 길이는 3m 정도 둘레는 90cm 정도 되는 크기로 모두 한결같았다. 이런 나무만 모으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초가집에 이런 좋은 나무를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창에 있는 이재 황윤석 선생의 생가 때문이다.


이재 황윤석 생가-1700년대 초기
이제 황윤석 생가의 초가지붕

이재 선생의 생가를 보면 그 지붕이 지금도 초가이다. 7칸의 큰 집에 기와가 아닌 초가를 올렸다. 이재 선생의 후손께서는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마을의 모든 집들이 지붕개량사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가지붕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선비 정신 때문이다. 집안에 엄청난 크기의 고정형 쌀뒤주를 두었을 정로도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에 초가를 이은 것은 황윤석 선생과 그의 선조들이 과하게 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재 선생의 후손 선생님-사진 왼쪽 하단 공간 전체가 쌀뒤주이다.  이렇게 큰 쌀뒤주는 본 적이 없다.

많은 식구들이 머물려면 집이 커야 했기 때문에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과 7칸의 안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은 초가를 얹어 부유함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손께서는 그 뜻을 이어받아 어떤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초가지붕을 유지했다. 이재 황윤석 선생의 생가도 유하당만큼의 목재는 아니었지만 그 목재의 선과 두께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부엌의 나무들이 그랬다.

이재 황윤석 생가 부엌의 들보와 서까래
이재 황윤석 생가 부엌의 들보와 서까래
이재 황윤석 생가 부엌의 들보의 상단-살림 도구를 걸어 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재 황윤석 생가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서 글을 한번 제대로 쓰고 싶다. 집 때문이 아니라 이재 선생의 사상과 가치관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맥락을 봤을 때 전주 최 씨 가문도 처음 유하당을 지을 때 그들의 부유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불어 시대적, 환경적 조건 때문에 기와가 아닌 초가를 올린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유하당 좌측 칸의 부엌 상단

다시 해체 현장으로 돌아와서 오전 내내 반자를 제거하니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부엌이 있던 자리는 그을음으로 인해 천장의 목재가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그 반대쪽, 가장 오른쪽 사랑방의 천장도 그을음이 있었다. 아니 그을음이 아니라 불에 탄 흔적이었다.

불에 그을린 유하당 우측 사랑방.
불에 그을린 유하당 우측 사랑방.

차행의 집처럼 유하당에도 언제가 불이 났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함양 허삼둘 고택처럼 샌딩을 하고 오일스테인을 칠해 보수했을 텐테 그 정도는 아니었던지 반자를 설치해서 가린 정도도 보수를 했다.

색이 조금 다르고 무늬가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 불에 탄 부분이다.

불에 탄 흔적을 꼼꼼히 바라보는 그를 향해 고 사장은 미안했던지 '아~ 불난 집 치고 부자 안된 집이 없데 이제 부자 되는 일만 남은 거여'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덩달아 조 목수도 '아 걱정하지마러 오히려 불에 탄 나무가 더 튼튼하고 오래가는 법이여. 샌딩 해놓으면 아주 깔끔하고 예쁘니까 걱정하지 마러'라고 위로를 더해주었다. 그도 허삼둘 가옥을 한번 본 터이라 그 말에 수긍했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반자와 벽지를 제거하는 와중에 특별한 도배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28년, 소화 2년 6월 21일 화요일자 신문 등 강점기에 발행된 아사히 신문과 어느 지역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활동하던 경제인들의 회보지로 보이는 '실업동지회' 회보였다. 신문지로 초배를 바른 것 같았다. 그런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벽에 붙여 초배지로 사용했던 신문.
벽에 붙여 초배지로 사용했던 신문.
벽에 붙여 초배지로 사용했던 신문.

그냥 버려도 될 정도의 상태였지만 그는 보관하고 싶었다. 유하당 역사의 일부분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점기라는 아픈 역사의 흔적이었고 증거물이었다. 그는 아픈 역사도 역사이고 그런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아픈 역사의 증거물들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엉뚱한 것을 모으는 친구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이유가 있다면 친구 철희 때문이었다. 전주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친구 철희에게 신문 한 장을 표구를 해서 주면 일식집에 어울리는 좋은 인테리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철희는 이미 가계를 폐업한 상태였다)

오전 일을 마친 그는 전주로 돌아왔다. 주말이었던 탓에 오후에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 목수와 고 사장에게 지붕 일을 하니 점심때 술을 드시지 말 것을 부탁하고 오후 일정과 다음 날 일정을 상의하고 서둘러 전주로 돌아왔다. 그는 다음 날도 일이 많아 현장에 가지 못할 상황이어서 여러 번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술을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벽지를 단골 표구 집에 맡겼다. 20여 년을 거래한 표구 집 사장님은 그가 아니면 이런 일 하지 않는데 그였기 때문에 표구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다만 표구가 언제 될지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잊고 있어라 말해주었다. 그 신문지들은 다음 해 봄에 7개의 표구가 되어 돌아온다.

표구한 신문
자세히 보면 '실업동지회'라는 제목이 보인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도배지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글이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도배지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전 매거진 '나는 집을 직접 고치기로 했다'에 있었던 내용이었으나 출판사의 요청으로 삭제되었고, 책에도 실리지 못했다. 출판사의 편집 과정에서 간택되지 못했다.

경복궁 천추전이나 교태전, 창덕궁 연경당 등 전통 한옥 내부를 보면 실내 모든 면이 도배지로 처리되어 있다. 문은 문풍지나 창호지로 측면까지 감싸 외풍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벽도 초배, 재배, 정배를 거처 최소 3겹으로 바르고 정배와 재배를 더해 5겹, 7겹으로 도배를 하기도 했다. 벽을 도배할 때는 기둥이나 문선, 인방재 등 목재를 노출시키지 않았고 방바닥은 장판지를 발라 콩댐을 해주었다. 이렇게 도배된 실내는 하얗고 정갈하다. 그 정갈한 방에는 많은 가구를 놓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서탁 하나와 사방탁자 하나만 두어 절제미와 품격을 더했다. 그런 공간을 선비가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선비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정갈하고 비어 있는 방에서 선비들은 ‘비움’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실천하려 노력했다. 마당과 함께 방을 공허하게 비워 유교와 불교의 ‘공(空)’ 사상, 도가의 무용(無用)사상 등을 실천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나아가 공간의 비움은 내면의 비움과 닿아 있고 이를 통해 무위의 가치관을 지향하고 그것을 삶에서 반추하고 실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전에 여유가 있었던 집들은 한지로 도배를 했다. 한지는 어떤 종이보다 훌륭한 종이이다. 1966년 석가탑 사리함 안 비단보에 싸여 발견된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싸고 있던 두루마기도 한지로 된 것이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12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한지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지가 그토록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한지가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와는 다르게 재료와 제작 과정에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지가 중성지라는 점 때문이다. 한지는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는 중성지라 황화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신문지나 오래된 교과서가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가 산성지이기 때문이다. 양지는 산성지로서 50~100년 정도면 누렇게 황화현상을 일으키며 삭아버리는데 비해, 한지는 중성지로서 세월이 갈수록 결이 고와지고 수명이 오래간다.

둘째는 한지를 만드는 과정에 닥풀을 사용기 때문이다. 한지를 만들 때에는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닥풀이라는 독특한 식물성 풀을 사용하였다. 닥풀은 뿌리에 점액이 많기 때문에 인피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속에 고루 퍼지게 하는 기능을 가져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한다.

셋째는 도침이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게 하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이는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이 도침 기술은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재료와 방식으로 만든 한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양의 기계식 제지 기술의 도입으로 저렴한 종이가 공급되면서 한지가 밀려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지 대신 많이 사용된 도배지가 신문이다. 유하당처럼 강점기 이후 한옥을 보면 여유 있는 집에서는 초배지로 신문을 많이 사용했다. 이런 100여 년 된 신문과 도배지를 의미 없게 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것도 하나의 역사이고 좋은 인테리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근대 한옥 유하당의 해체 첫날이 지나갔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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