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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리스트 Oct 06. 2019

옛집(한옥)을 좋아한 그에 대한 기록-31

초가집 1879 해체 및 보관에 대한 기록.

해후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했다. 핸드폰도 삐삐도 없는 시절이었다.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집이나 직장으로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해야 하는 시대였다. 약속의 유효 기간이 길었고, 말의 가치가 높았던 시절이었다.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발품을 팔아야 했고, 헛된 만남이 드물었다. 그는 학생 신분이었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도 없어진 때라 누구든 그와의 만남이 쉽지 않았다. 제대한 돌삼은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돌삼은 메모해 놓았던 그의 대학교 과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한 번은 복학하기 전이었고, 한 번은 휴학 중이었으며, 몇 번은 사소한 이유로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어렵게 그와 돌삼은 통화를 하게 되고 그는 돌삼의 고향집에 찾게 된다.

돌삼의 고향은 깊은 산골이었다. 마을까지 버스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면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면 구판장이 있는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내려 다시 수 킬로미터의 비포장 도로를 걸어가야 돌삼의 마을이 있었다. 초행의 객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돌삼은 구판장이 있는 큰 마을의 정류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돌삼의 모습은 세한의 소나무 같았다. 버스에서 내린 그를 돌삼은 왈칵 안았다. 그는 울컥했다. 버스가 고갯길을 넘어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떨어진 두 사람은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그 눈빛은 젊은 사내들의 그것보다는 긴 세월을 함께 건너온 늙은 농부와 농우의 눈빛 같았다.  

그들은 비포장 길을 걸어 돌삼의 마을로 향했다. 투박한 길을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돌삼은 말의 시작과 끝에 '분대장님'을 붙였다. 그는 그렇게 부르면 다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고는 돌삼을 '형'으로 불렀다. 그때서야 돌삼은 '분대장님'의 자리에 그의 이름과 '동생'이라는 호칭을 채워 넣었다. 그는 돌삼에게 많은 것을 물었고 돌삼은 답했다. 그러나 그가 제대한 이후 돌삼의 군생활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기는 그들이 걷고 있는 투박한 비포장 길과 닮아 있는 것 같았다.

돌삼의 집에 도착한 그는 돌삼의 노모를 만났다. 마루에 지팡이를 잡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노모는 그와 돌삼이 대문을 들어서자 금낭화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희미하게 웃었고, 고사리 잎이 펴지듯 천천히 일어났다. 고희를 넘어 팔순의 나이에 다다른 돌삼의 노모는  백발이었다. 작은 몸과 굽은 등을 지팡이에 의지한 그녀가 천천히 마당을 걸어 마중 나왔다. 만약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이 현신한다면 노모의 모습일 것만 같았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안방에 들어가 큰절을 했다. 노모는 절을 마친 그의 손을 잡고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는 노모의 말보다도 깊은 주름을 가진 부드러운 손길에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돌삼의 노모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돌삼의 집을 구경했다. 전형적인 두메산골의 삼 칸 초가집이었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뀌었지만 처음에는 초가를 올린 듯했다. 남향집에 서쪽에 부엌을 두고 전면에는 두 칸의 툇마루를 둔 시골집이었다. 이 집에서 돌삼과 그의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랐을 것이다. 조금 커서 행랑채로 방을 옮기면 형들과 티격태격 아랫목 싸움을 했을 것이다. 돌삼이 잔다는 윗방에는 고구마, 고추, 팥, 녹두 등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어떤 것은 조롱박에 담겨서, 어떤 것은 독과 가마니에 담겨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우렁각시는 어디 있냐는 그의 농담에 돌삼은 그냥 웃기만 했다.

저녁상이 나왔다. 노모는 그를 위해 나물을 무치고, 두부를 만들고, 닭을 삶아 상을 내왔다. 상에는 주전자에 가득 막걸리도 담겨 있었다. 모두 노모가 손수 만든 것들이었다. 봄에 지팡이를 짚고서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거둬들여 말린 취와 고사리와 머우대는 그 향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온 마을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자란 닭은 닭과 꿩의 중간쯤 되는 것 같았다. 맛도 그랬다. 봄부터 고랑과 이랑의 김을 호미로 매고, 꿩과 멧돼지로부터 지켜낸 콩을 불리고 갈아 만든 두부는 따뜻하고 고소했다. 돌삼이 산비탈 다랑이 논에서 거둬들인 쌀로 만든 막걸리는 달고 맛있었다. 막걸리가 달고 맛있다는 그의 말에 노모는 막 담근 김치를 손으로 찢어 두부를 감싸 그의 입에 넣어주며 막걸리는 예부터 '노인의 젖'이라 조금 단것이 좋다는 말을 해주었다. 한 때는 열댓 집이 넘었다는 마을에서 음식 솜씨가 가장 좋아 모내기 철에는 일을 하지 않고 음식만 했다는 노모의 밥상은, 일찍 어머니를 잃어 쓸쓸한 밥상만을 마주했다는 그를 위한 노모의 밥상은, 그의 지난 초라했던 식사의 보상과 같았고, 남은 삶의 거름과 같았다.

봉놋방처럼 따뜻한 돌삼의 방에서 밤새 술상을 앞에 두고 이야기에 나눈 그들은 다음 날 노모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헤어졌다. 노모에게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인사와 함께 큰절을 하고 대문을 나서자 노모는 치마 속 속곳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모서리가 딱 맞게 접힌 돈은 미리 준비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쌈짓돈을 받아 품 깊숙한 곳에 넣었다. 돌삼과 그가 산 모퉁이를 돌아 노모와 마지막 눈인사를 할 때 노모는 가라는 뜻인지 오라는 뜻인지 모를 손짓을 했고, 그는 다시 절을 했다.

두 사람은 비포장 길을 걸어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왔다. 버스는 예정 시간에 정확히 도착해 그와 돌삼에게 긴 이별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시 보자 약속했다. 돌삼은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이 여비는 갈 때 쓰는 여비가 아니라 올 때 써야 할 여비라며 다음에 배가 고프거든, 옛 생각이 나거든 이 여비로 다녀가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를 태운 버스가 떠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해 첫눈이었다. 돌삼은 장승처럼 눈을 맞으며 고갯길을 넘어가는 그를 태운 버스를 한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민가 한옥 1879 해체기.

2017년 겨울. 그는 우연히 돌삼의 집과 닮은 삼 칸 집을 보게 된다. 임실군 이인리의 깊은 두메 마을에서였다. 길을 알아도 찾기 힘든 그런 마을이었다. 새롭게 땅을 구매한 주인 할아버지는 집터를 밭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집을 쉽게 헐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한 때는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었고, 6.25 때는 불이 붙은 집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끈 적도 있었고, 주인 또한 그 집과 인연이 있어 쉽게 허물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인연 거쳐 그가 이 집을 보게 되었다.

1879년 초가집의 정면

그는 이 집을 보자마자 돌삼과 그의 노모를 떠올렸다. 돌삼은 아마도 50의 나이에 가까워졌을 것이고, 돌삼의 노모께서 살아계셨다면 백세에 가까운 나이가 되셨을 것이다. 세월에 당하며 오랫동안 잊고 지낸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노모가 차려준 밥상과 그녀의 손길은 여전히 그리운 것이었으나 돌삼이 준 여비를 그는 아직 쓰지 못했다. 그는 이 집을 보자마자  작은 몸과 굽은 등을 지팡이에 의지한 노모가 천천히 마당을 걸어 마중 나올 것만 같았다. 술상을 앞에 두고 지난 일을 얘기하다 문득 담배를 권했던 돌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윗방에는 아직도 조롱박에 담긴 씨앗이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기억 속 돌삼의 집과 이 집은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옛 추억만으로 선뜻 집을 해체해 보관할 수는 없었다. 그도 집의 경제적 가치와 쓸모, 집의 구조와 목재의 상태, 집의 역사성과 활용도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게 된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져 가는 1800년대 민가 살림집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의 생각은 맞지만 언제까지나 그것들을 모을 수만은 없었다. 옛집, 옛 한옥은 결국 다시 이축, 이건을 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를 조성해 전통문화 체험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그의 상황으로써 어불성설이고, 마음 같아서는 몇 채를 원형대로 세우되 현대식 디자인을 더해 요즘 추세인 '뉴트로'와 비슷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식당과 북카페, 전통 찻집과 와인바를 해볼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이축과 이건은 남되 보호와 재건은 사라지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눈물을 머금고 한 두 채는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했다. 구매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파는 것이 그도 나도 마음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지금까지 한 일도 훌륭한 일이며 좋은 주인을 만난다면 처음에 목적이었던 '사라져 가는 1800년대 민가 한옥 살림집의 보호와 활용'이라는 뜻은 이루어지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는 그 위로와 권유를 이해하는 듯했으나 선뜻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일단 그는 이 집을 해체해서 보관할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집을 꼼꼼히 둘러봤다. 먼저 외형은 정면 삼 칸에 측면은 전퇴와 후퇴가 있는 겹집, 혹은 양통 집(양통 집은 낭림산맥, 북대봉산 동쪽, 함경남북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국의 동북부 일부 지방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양통 집은 정주간, 봉당·대청이 있는 것 등의 3가지 형태로 나뉜다. 이것들은 서로 분포지를 달리하므로 흔히 북부형·중부형·남부형이라고도 한다)이었다.

양통집(한국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같은 임실 지역에서 그가 해체해서 보관하고 있는 1841년 한옥과 비슷한 구조였다. 전라도 지역에서 정면 삼 칸에 겹집, 혹은 양통 집은 드물어 나름 의미가 있는 외형이었다.  

1897년 초가집의 정면과 좌측면
1841년 이전에 지어진 3칸 초가집
1841년 이전에 지어진 3칸 초가집

이어서 마루를 보았다. 1841이나 1874, 1893년 한옥의 마루만큼은 아니어도 잘 만든 우물마루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여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씻어내거나 샌딩을 하고 생들기름을 먹이면 묵직한 마루 고유의 색이 살아날 것 같았다.

1897년 초가집의 툇마루

한옥, 그중에서도 고택은 부엌 공간에 좋은 목재를 많이 사용한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부엌은 다른 곳과는 달리 반자를 하지 않기 때문에 목재를 바로 확인할 수 있고, 집의 구조와 특징도 확인하기가 용이하다. 부엌의 천장 구조는 얼마 전에 해체한 1928 근대 한옥과 1874 한옥과 비슷한 구조였다.

1897년 초가집 부엌 상단
1897년 초가집 부엌 상단
1874년 부엌 상단

부엌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대들보는 소나무 무늬가 도드라져 보였다. 샌딩을 하거나 약간의 손질만 더해 무늬를 살려내면 무척 아름다운 목재가 될 것 같았다. 부엌에는 1893 동학 집처럼 작은 광이 설치되어 있었고, 1928 근대 한옥처럼 아궁이 위로 벽장이 만들어진 구조였다. 아기자기한 구조였다. 1841 한옥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대목수가 신경을 많이 쓴 집 같았다.

1879 초가의 부엌
1893년 초가집의 부엌 -좌측 하단에 작은 방이 보인다.

전면 툇마루는 다른 집들에 비해 상당히 넓은 구조였다. 툇마루가 동선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1874년 고택)일 경우에는 넓지 않지만 생활공간으로 활용할 경우에는 이처럼 넓은 경우가 많았다. 진안의 서이당이나 1841년 고택이 이러한 경우였다. 따라서 툇마루 상단의 툇보 또한 상당히 크고 길었다. 지금까지 본 집 중에 가장 넓은 툇마루였다. 부엌의 들보와 같은 산에서 구해온 나무인지 툇보의 무늬가 비슷해 보였다.

1879 초가집의 툇마루 상단
1879  툇마루 중앙 툇보의 보아지의 문양

툇마루의 퇴보에서 특별했던 것은 문양이었다. 이러한 문양에 대해서는 따로 한 편의 글을 쓸 계획이어서 다름으로 미루고자 한다.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는 툇마루는 매우 넓다. 좌측 1841 초가, 우측 진안 서이당
진안 서이당.
동선을 확보하기 위한 툇마루는 폭이 좁다. 이런 집의 경우 대부분 내부에 대청이 있다. 1874년 고택 외부

툇마루와 부엌이 연결되는 벽은 흙벽이 아니라 판벽의 형태였다. 1879년의 시대는 판자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 벽을 흙이 아닌 판자로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추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1879 초가집 툇마루의 좌측 면

마루 우측 상부 구조는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물매를 잡기 위해 위어진 보(충량?)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상부에 물이 스며들었는지 서까래와 추녀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문선의 경우 정성스럽게 만든 흔적이 보였다. 전북 장수의 민가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듯했다.

1879 초가집의 툇마루 우측 상단-하단 문선을 정성들여 결합했다.
전북 장수 삼 칸 초가집의 벽선-전라북도에 남아 있는 초가 중에 가장 오래된 초가가 아닐까 싶은 집이었다.

내부 구조는 정면 삼 칸 구조였지만 전퇴와 후퇴가 있는 겹집 구조여서 아기자기하게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모든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통구조'였다.

1879 초가집의 뒷칸-난방과 저장을 위한 구조 같았다.

'통구조'란 집 내부에서는 공간이 막히지 않고 순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길은 좁은 복도가 아니라 여러 갈래이며 그 형식도 여러 가지이다. 방끼리 통하기도 하고 마당과 대청마루를 건너기도 한다. 방과 방 사이에 벽이 없고 창호만 있어 창호를 들어 올리면 길이 된다. 사방으로 적당히 뚫려 있고 적당히 막혀 있다. 한옥 공간이 순환한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하나로 ‘통(通)’한다는 뜻이다. ‘원(圓)’은 완전 도형이라 해서 동서양 모두에서 최고의 상태로 간주했는데 한옥에서는 이를 공간에 적용해서 막힘없이 둥글둥글 도는 동선 구조로 만들어 냈다. ‘원’에 ‘통’을 결합해서 ‘원통’한 공간으로 만들어 낸 경우는 한옥밖에 없다. 원통은 원처럼 둥글어서 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뒤돌아서는 일 없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옥 공간에서는 여러 공간을 거쳐 가는 돌아가기와 최단 거리로 가는 질러가기가 모두 가능하다.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임석재. 인물과 사상사. 2013.


이 집의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인방재였다. 집 내부에는 곳곳에 인방재가 설치되어 있었고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외부의 인방재 중에 기둥과 문선을 연결하는 소매인방, 활개인방이 통목이 아닌 판자였다.

우측 방의 뒷칸
벽을 가로지른 인방재가 보인다.

처음에는 이를 나무를 아끼려는 일종의 편법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사용된 나무가 상당히 좋은 목재였고, 정성들여 지은 집인데 도편수가 목재를 아끼기 위해 판자로 된 소매 인방을 넣을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진 중앙 왼쪽의 소매 인방이 벽과 분리된 모습이 보인다.

여러 추론 끝에 난방을 위한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된 글이 '나는 집을 직접 고치기로 했다'에 있어 옮겨본다. 이 책은 다른 제목으로 10월 중에 출판 예정이다. 책 출판과 관련된 내용은 따로 글을 마련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한옥이나 중목 구조의 몇몇 가옥에 외부에서는 인방재를 확인할 수 있으나 내부에는 인방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즉 겉에서 보기에는 인방재가 있으나 안쪽에는 따로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방재가 없이 전체가 하나의 벽인 경우가 있다. 이는 판자를 켜서 외벽에 간단하게 붙여 마감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처음에는 자재비와 인건비를 아끼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정성 들여 규모 있게 지은 집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인방재를 마감한 집을 장수와 임실 지역에서 보았다. 춥다는 장수와 임실에서도 해발이 500m 이상 되는 추운 곳이었다. 지역적 환경을 고려했을 때 판자 형태의 외부 인방재를 사용한 이유는 인방재와 벽 사이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냉기를 막기 위함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방재와 벽 틈이 벌어져 바람과 냉기의 유입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를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그런데 실용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판자형 인방재를 외벽에 넣은 이유는 인방재를 넣음으로써 아름다움과 시각적 안정감을 얻기 위한 목적이라 생각되었다. 단열성을 확보하되 미학적 완성도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짓는 한옥과 중목구조 등 몇몇 목조주택에 위와 같은 일명 '통벽시스템'을 구축하고 외벽에 인방재를 넣지 않는 경우를 보았다. 난방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얇은 판자의 인방재조차 넣지 않은 집을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열성을 비롯한 실용성은 확보했지만 미학적 완성도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목조 주택은 난방의 효율성을 위해 통벽시스템을 만들더라도 외벽에 인방재를 넣어 면 나눔을 해주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1841년 초가집의 부엌 벽면

외벽과 내벽의 면 나눔은 우리 옛 고택의 면 나눔을 참고하면 좋겠다. 사진의 벽면은 1841년에 지어진 임실의 3칸 한옥의 부엌 벽면이다. 이 벽면을 보면서 이 집을 지은 옛 목수가 계산해서 목적을 가지고 면을 나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나누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나무의 두께와 비율까지 계산해서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면을 나누었다. 목수와 가주의  안주인을 위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집을 지을 때 건축주가 옛 고택이나 잘 지어진 집들을 많이 보고 그것들을 참고해 외벽 치장 등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을 짓는 일의 시작은 아름다운 집, 건강한 집을 많이 보는 일부터다. 집을 짓기 전에 안목부터 길러야 한다.


집 내부는 반자가 이미 제거되어 있었다. 다녀 간 여러 명의 고택 수거 업자 및 고재 매입상, 골동품상들이 상량문을 확인하기 위해 제거한 듯했다. 상량문의 먼지가 많이 쌓여 상량문 전체를 읽어볼 수는 없지만 기묘년 정월(己卯年 正月)이란 연도와 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이 기묘년 정월을 1939년 1월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옛집의 상량문을 통해 건축 연도를 추리할 때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60 갑자에서 가장 가까운 연도로,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1937년 생인 마을 할아버지께서 이 집은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오래된 집이었고 서당 훈장님의 집이었다는 말을 참고하면 1879년이 적절한 듯했다. 더불어 지붕을 덮고 있는 겨릅대(삼을 벗겨내고 난 삼대의 줄기) 등을 고려하면 1879년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다만 기둥이 생각보다 얇다는 점, 서까래 일부에 못이 박혀 있었다는 점 등이 그런 판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못을 박은 이유를 후에 알게 된다. 1952년 정도에 이 집은 빨치산에 의해 지붕과 집 일부가 불에 타게 된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불길은 잡혔지만 그때 집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부 서까래의 못은 그때,  보수를 할 때 사용된 것을 보였다.

집의 후면 사진이다. 사진 좌측면의 벽과, 중앙 두 개의 대들보에 불이 탄 흔적이 남아 있다.

실제로 5.25 전후에는 산간 두메 마을에 이러한 일이 자주 발생한 듯했다. 비슷한 일이 1953년에 진안군 정천면 갈거마을에서도 일어났다. 6.25 전쟁 막바지 빨치산에 의해 정천면 갈거 마을 대부분의 집이 불탔다. 정천지역은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요충지여서 빨치산이 머무르기에 맞춤했다. 특히 갈거마을은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 위치해 빨치산이 은거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빨치산은 낮에도 숲이 우거진 마을 뒷산에 숨어 사람들과 마을 주변을 감시했다. 병력의 이동은 없는지, 식량이나 가축의 유입은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거북하게 여긴 경찰은 1953년 늦은 가을 마을 사람들에게 뒷산 나무를 벌목하게 해서 빨치산이 은폐, 엄폐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한다. 그날 밤 마을 대부분 집들이 불에 탄다. 이를 계기로 군과 경찰은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 임실군 이인리에서도 발생한 것이고 그 흔적이 저렇게 남아있는 것이었다. 여하튼 여러 정황상 이 기묘년 정월(己卯年 正月)은 1879년으로 봐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집을 모두 둘러본 그는 주인 할아버지에게 정말 좋은 집이라고,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목재도 좋고, 집이 역사성도 있어서 의미 있는 집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당으로 사용되었고, 6.25의 흔적과 마을 사람들의 공력이 들어간 집이어서 더 가치 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듯한데 왜 팔지 않으셨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녀간 사람들치고 '날도적놈'이 아닌 놈이 없다는 살아있는 표현을 하셨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집을 보러 왔지만 모두를 집의 흠만 잡았다는 것이다. 문이 없어서, 일부 서까래와 추녀에 물이 닿아서, 인방재가 판재여서, 집이 작아서, 지붕의 재료를 처리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서, 자동차가 마당에 들어오지 못해서 등 흠만 잡으며 집을 그저 공으로 가져가려 했다고 얘기하셨다. 하다못해 막걸리 값이라도 달라는 말에 다녀간 사람들은 치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라며 늙은 농부의 자손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럴 바에야 헐어서 화목으로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그리고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집과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그도 할아버지 말에 공감했다. 물론 다녀간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들도 이 집의 가치를 알고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자네가 가져가게 자네만 집 볼 줄 아는 사람 같네, 다만 그냥은 못 주고 막걸리 값이라도 주게'라고 선뜻 제안을 하셨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돈을 드리고 날짜를 잡았다. 할아버지는 이 터를 빨리 정리해서 봄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얼떨결에 서당으로 사용된 1879년 한옥을 해체하게 되었다.


해체 당일 날이 되었으나 목수를 구할 수가 없었다. 조 목수는 경기도 어디에서 한옥 단지 공사에 참여해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다른 목수를 소개해 달라는 말에 겨울이라 한참 치목 중이어서 목수를 구할 수 없으니 직접 해체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는 이제 전문가가 다 된 훈과, 한의 도움을 받아 직접 초가집을 해체하기로 했다. 그와, 훈, 한, 한의 조수, 그리고 두 명의 용역을 섭외했다. 전날 그는 미리 목재에 넘버링을 하고 간단하게 평면도와 입면도를 그렸다. 더불어 간단하게 고유제도 지냈다. 할아버지는 해체 기일이 며칠이나 걸린 것인지 물었다. 그는 하루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다녀간 사람들은 모두 최소 삼일을 잡았는데 정말 하루면 될 것 같냐고 다시 물었다. 집이 크지 않아 그 정도면 될 것 같다고, 다만 할아버지께서 밭을 만들 때 주춧돌과 토방돌, 구들을 따로 모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다음날 해체가 시작되었다. 내부는 정리할 것도 없어 바로 지붕의 기와를 내렸다.

보토를 걷어내니 산자로 사용된 겨릅대가 나왔다.

겨릅대는 저릅대라고도 부르는데 껍질을 벗겨내 삼의 줄기를 말한다. 껍질은 벗겨서 삼베의 재료로 사용하고 그 남은 줄기를 지붕에 산자로 사용한 것이다. 겨릅대는 적심재뿐만 아니라 이엉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1960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겨릅대를 짚 대신 이엉으로 엮어 지붕을 올린 집을 겨릅집이라고 한다. 속이 빈 겨릅대가 단열재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겨름에는 시원하다. 겨릅대와 짚이 아닌 갈대로 이엉을 이은 집을 '샛집'이라고 하는데 전북 장수의 수분리라는 곳에 한동안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 겨릅대를 제거하니 서까래가 나왔다.

그런데 서까래가 하나가 아닌 단연과 장연, 두 종류의 서까래를 사용하고 있었다. 겹집, 양통집인 까닭에 물매를 잡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이는 1928년 근대 가옥과 비슷한 구조였다. 구조도 비슷했지만 사용된 목재가 모두 곡재라는 면에서 1879년 집은 1928년 집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1928 근대 한옥의 후면
1897년 집은 1928년 근대 한옥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상부 구조 해체가 끝나고 상량문을 확인했다.

벽을 분리하고 목재를 수거했다.

마지막 기둥을 뽑고 집 해체를 마무리했다.

일을 마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할아버지는 찾아와 100년 넘게 서있던 집을 한 나절만에 해체했다며 사람의 손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가져오신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막걸리는 달고 맛있었다. 할아버지는 부디 좋은 자리에 앉혀서 좋은 곳에 사용하라는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겹집인 탓에 삼칸 집임에도 상당히 많은 양의 목재가 나왔다. 목재를 창고로 옮긴 후에 그들은 일을 마쳤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이 집을 다시 앉혀 세한의 소나무를 닮은 돌삼과 금낭화 꽃잎처럼 웃고, 조왕신처럼 자애로운 돌삼의 어머니를 한 번쯤 모시고 싶었다.  그는 그날이 꼭 다시 오기를 바랬다.


여기에서 초가집 1879 해체 및 보관, 사연에 관한 그에 대한 기록을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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