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엄마가 된 나. 내가 모르는 남의 세상에 끼어들기
난 30살에 미국에서 엄마가 되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미국으로 유학 왔다. 그리고, 한국 대기업의 미국 지점에서 일 년 조금 넘게 일하다가 미국 유대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이 심플한 세 문장의 서사가 내 일생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바꿀 줄이야. 이 중 “엄마가 된 거”과 “미국에서”는 참 힘들 조합의 결정체라는 걸. 난 몰랐다.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문화에서 엄마가 된 다는 게 이렇게 힘들었을 줄이야. 미국은. 어렸을 적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내 꿈을 이룰 곳이었고. 근데 아이를 낳은 후로 그곳은 현실이 되고 전장이 되고 원정 경기장이 되었다. 난 정말 미국에서 아이 키우는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예를 들면 미국 이유식은 배하나만 갈아서 먹이는, 과일이나 채소 하나씩 갈아서 먹이는 게 시작이다. 이게 끼니이다. 파스타를 갈아 먹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얼마나 헤매었는지. 난 이게 간식인 줄 알았다. 그래서 도대체 이유식의 주식은 언제 뭘 어떻게 주라는 건지, 채소 하나, 당근 하나, 가 주식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란 나는 이유식 시작 할 때 주식은 언제 주는 건지만 찾아 헤매었다. 한국 같이 쌀이 들어가야 주식인 게 아니라니.
난 한국 사람들이 정말 하나도 없는 곳에서 엄마가 되었다. 과일 갈아주라는 소리를 주위에서 미국 엄마들이 하기는 했지만, 그게 주식이라는 개념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 꽤 걸렸고. 말도 안 돼. 첫 째 아이. 해석하면 첫 째 아이는 어디 함부로 내려놓지도 않는 조심함으로 키우게 되고. 토종 한국인인 나에게 채소 하나 갈아서 끼니를 때우게 주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으로 이 두 문장에 정리된 나의 마음은 수없이 네이버를 뒤져서 한국 엄마들의 이유식을 따라 하게 했다. 미국에 살면서 난 우리 첫째 아이의 모든 걸 한국식으로 했다. 유난히 아니라. 그게 내가 친숙한 거라서. 친숙함이 이리 무서울 줄이야. 처음으로 엄마가 된 나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했고, 불안함은 친숙한 것들을 찾게 했다. 근데 미국에서, 한국 마켓도 고속도로 타고 한 시간 가야 있는 곳에서 한국 식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건 모든 게 두 세 단계 복잡해야 한다는 거.
근데,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이들의 유아기를 보냈고,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를 보냈고. 이젠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었다. 진심으로, 내 손에서 살아남아 주어서. 너무 고맙다. 언제나 모자랐었던 거 같은 맘의 손에서.
그리고 난 9년 차 주부 고수가 되었다, 코로나 때 홈스쿨링 맘이 되고, 미국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올해는 쉬고 있다.
아직도 여느 때는 내 작은 아이가 내가 한 때 살았던 중학교 시절을 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아주 한국인 같은 엄마를 만나, 한국인도 별로 없는 이 동네에서 누구 못지않은 한국 방식으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매일 우리는 아이유의 가을 아침 가사 같은 그런 아침을 보낸다. 이렇게 난 미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기묘하고 신기한 모험을 하며 한국이 란 집을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