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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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용기이다.-윈스턴 처칠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경(영어: 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a], 1874년 11월 30일~1965년 1월 24일)은 영국의 정치인, 군인, 작가로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0년부터 1945년과 그 이후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냈다. 1900년부터 1964년 사이 62년 동안 하원의원(MP)이었으며 이 동안 총 5개의 선거구를 대표했다. 경제적 자유주의제국주의를 고수했던 처칠은 정치 경력 대부분을 자신이 1940년부터 1955년까지 이끌었던 보수당 소속으로 지냈으며, 1904년부터 1924년까지는 자유당 소속이었다.

처칠은 옥스퍼드셔주에서 귀족 가문 스펜서가에서 태어났다. 1895년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영국령 인도, 마흐디 전쟁, 제2차 보어 전쟁 등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며, 이후 전쟁 특파원으로 명성을 얻고 자신의 작전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1900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처칠은 1904년 자유당으로 당을 옮겼고, H. H. 애스퀴스의 자유정부에서 상무원 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내며 교도소 개혁과 노동자 사회 보장을 옹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해군성 장관으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감독했지만 작전 실패로 해임되었고 랭커스터 공국상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 11월 공국상에서 사임하여 서부 전선에서 6개월 동안 왕립 스코틀랜드 보병 연대에서 대대를 지휘했다. 1917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정부에서 내각에 복귀하여 군수장관, 전쟁장관, 항공장관, 식민지 국무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영국-아일랜드 조약중동에서의 외교 정책을 감독했다. 2년 동안 잠시 의회를 떠난 이후 스탠리 볼드윈의 보수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지만, 1925년 처칠은 파운드제를 금본위제로 되돌려 경제 침체에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 "황야의 시기"라고 불렸던 기간 동안 처칠은 공직에서 물러나 나치 독일군국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재무장을 요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성 장관으로 재임명되었다. 1940년 5월 네빌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영국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국민정부를 구성하여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전쟁을 주도하여 1945년 승리를 얻어냈다. 1945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며 처칠은 제1야당 대표가 되었고 소련과의 냉전이 심화되면서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를 경고하는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유럽의 통합을 촉구했다. 처칠은 두 임기 사이에 여러 권의 책을 썼고,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1951년에 재집권했다. 처칠의 두 번째 임기는 외교, 특히 영국-미국 관계와 인도가 이탈한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국내적으로 정부의 우선순위는 광범위한 주택 건설 프로그램이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건강이 악화되자 처칠은 1955년 총리에서 사임했고, 하원의원직은 1964년까지 유지했다. 1965년 사망하자 국장을 치루었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인 처칠은 영국과 영미권 지역에서 인기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파시즘의 확산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 전시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4] 처칠은 종종 제국주의와 인종에 대한 특정 발언, 지역 폭격과 같은 일부 전시 결정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 총리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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