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어제의 흔적이다. 자기 전에 술을 마셨다면 무거운 머리의 거센 항의가, 무서운 영화를 보았다면 밤새 뒤척인 후 쌓인 피로가, 슬픈 글을 읽었다면 아련한 마음의 무게가, 가벼운 운동을 했다면 온몸에 퍼진 활기가 하루를 맞이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서 비롯된 이 순간의 감각을 차근차근 살펴본 후에야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만큼 시간이 필요한지도 어제를 어떻게 마무리했느냐에 달려있다. 물을 한잔 마시고 요가복으로 갈아입는다. 요가매트 위에 서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몸을 천천히 풀어준다. 곧이어 호흡을 길게 늘이며 허리를 숙여 두 팔을 발 양 옆으로 늘어뜨린다. 한쪽 무릎씩 번갈아 구부려 다리의 근육을 다독이고 어깨에 힘을 뺀 채 두 다리와 아랫배 깊숙이에 집중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순서에 따라 아사나를 하나씩 이어간다. 종종 호흡이 흔들리고 마음만큼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눈살이 찌푸러지기도 한다. 어느새 온몸에 열기가 흐르고 한결 가벼워진 몸을 느낀다. 마지막 동작이 끝난 후에 매트 위에 힘을 빼고 드러눕는다.
일요일에는 갑작스레 종교인의 마음이 되어 안식일이라는 핑계로 침대에서 뒹구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진다. 미룰수록 몸은 더욱 무겁고 나른해지지만 침대에 누워서도 손가락만 움직이면 핸드폰 화면에서 재미있는 일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그렇게 팔다리는 이미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버리고 척추마저 말랑해지기 시작할 때, 바로 이때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어렸을 때 미국 영화에서 보았던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다 소파보다 더 거대한 몸집을 갖게 된 여자는 이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아직도 그 영화를 떠올리면 시대를 풍미했던 꽃미남 배우 2명이 펼친 열연보다 그녀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그녀는 남편이 자살을 했으니 마지막 기회를 인지하기에는 고통이 너무나 컸을 것이다. 그녀가 늘 입던 꽃무늬 원피스를 떠오르게 하는 꽃무늬 이불에서 겨우 빠져나온다. 무병장수의 꿈을 잊지 말자. 기지개를 켜며 스스로를 꾸짖지만 이미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몸은 요가 매트와는 영 낯을 가린다. 그리고 이날은 우울한 날이 된다. 찌뿌둥한 몸에 밥을 먹으면 더부룩함까지 더해져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이 되어 볼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반드시 요가를 하리라 다짐하며 해 질 녘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감자칩이 들어있는 서랍에 자꾸 눈길이 가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는 꽃무늬 이불을 덮고 모로 눕는다.
요가를 하는 것은 하루하루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다. 정확히는,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다. 요가를 하고 나면 온 몸에 있는 세포가 하나 되어 무슨 일이든 거뜬히 해낼 자신이 있다며 외쳐댄다. 덕분에 몸의 움직임은 한껏 가벼워지고 마음은 한껏 긍정적이 된다. 요새는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수련하고 있다. 이제 막 입문했기 때문에 부족한 점 투성이다. 그러나 요가가 주는 기쁨은 수련 도중 얼마나 흔들리고 넘어졌는지에 상관이 없다. 스스로 느끼기에 뜨거운 에너지가 온몸을 흐를 정도로 충분히 수련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느낌은 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 요가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나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움직이면 어디에 자극이 되는지, 어느 아사나를 이어가야 몸이 열리는지, 또 몸의 어는 부분이 아직 열리지 않아 더욱 노력해야 하는지, 나의 몸에 대한 세세한 모든 것을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다.
살면서 한 번도 운동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 체력장에서 언제나 5급을 받았지만 급을 높이고자 노력할 필요성도, 의욕도 느끼지 못했다. 당연히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체육. 그중에서도 체육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피구를 나는 제일 싫어했다. 초등학생으로서 짬밥이 최고로 쌓였을 때는 선생님이 오늘은 피구라고 외치면 만화책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상대팀에게 어서 나를 쳐달라고 부탁하고는 한쪽으로 물러서 만화책을 읽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체육부장에게 공 하나 던져주고는 교실에서 나오지도 않는 선생님이 나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허락해주었다고 여겼다. 그 후로도 꾸준히 나는 언제나 운동을 못하고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달리기가 느리고, 팔굽혀펴기를 못하고, 물구나무서기를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 체육을 싫어하는 것은 학생으로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운동을 못한다는 것은 그저 많은 분야 중에 하나가 부족하다는 의미 이상으로 삶에 영향을 미쳤다. 언제나 체력장 5급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의 몸은 내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신체적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의 몸은 허약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몸의 기능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자란 사회에서 몸은 외관이 중요한 장식품과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그것도 시대에 따라 쉽사리 변하는 기준에 알맞은 아름다운 몸을 가지는 것이었다. 새삼스레 덧붙이자면 여자의 몸에 드리워지는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내게 살을 빼라고 이야기했다. 빼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들에게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마냥 말하는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매우 매우 나빴다. 그들의 평가 덕에 안 그래도 기능도 부족한 나의 몸은 더욱 부정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시야를 가득 메우는 나의 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우울해졌다. 쓸 데도 없고 예쁘지도 않은 몸. 에라이 아이크스림이나 먹자.
나의 어두운 면을 외면으로 극복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러네이 엥겔른이 쓴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빛과 소금만큼이나 귀한 목소리를 만났다. 예쁘든 말든 여성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며, 나아가 우리 몸의 외면보다는 그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뛰어갈 수 있는 다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 덕분에 나는 외면해왔던 나의 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시각을 내게 가져다준 것이 요가였다. 여전히 나의 몸은 너무 무겁고 느리며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힘들던 아사나가 어느 순간 익숙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나의 몸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실패하더라도 노력하고 있는 나의 몸이, 그리고 이미 익숙한 아사나를 해낼 수 있는 나의 몸이 매우 자랑스럽다. 나의 동의 없이 만들어진 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기는 싫지만 나의 의지로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몹시 하고 싶다. 안달 나게 하고 싶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나의 몸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를 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여전히 사회가 제시하는 미의 기준을 무시하지 못하고 또 그에 들어맞지 않는 나의 몸에 의연해지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허리를 숙여 다리를 굽히지 않은 채로 엄지발가락을 잡을 수 있고, 오른팔을 등 뒤로 넘겨 왼 허벅지 위에 올린 오른발을 잡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의 몸에 비판을 가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아주 요란을 떨며 말할 거다. 지금도 어려운 아사나에 끙끙댈 때면 머릿속에서 네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주눅 들지 않고 그 목소리에게 닥치라고 외친다. 지금 다리가 부들부들 거리는데 너까지 상대할 여유가 없다. 머리서기를 연습할 때마다 넘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온몸으로 퍼진다. 실제로 넘어져서 벽을 부수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내가 이 두려움을 넘을 정도로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우르드바 다누라사나를 한 채 엄마 앞을 후다닥 지나가 뚱뚱하다고 나를 놀려대던 엄마가 자지러지게 놀랄 그 날을 고대해본다. 엑소시스트 자세로 유명한 바로 그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