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나무꾼_20240412
자기만족이 중요한 시대다. 타인의 기준이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나 스스로의 기준과 만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요즘이다. 한국은 인생의 여러 단계들(대입, 취업, 결혼, 출산까지)이 마치 필수 코스처럼 방향과 시기가 정해져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각자 원하는 것을 찾고 그 방향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나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나도 유년기와 학생 시절을 비교적 엄격한 아버지의 기준 속에서 보내면서 오히려 내 생각과 내 주장이 뚜렷해졌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계속 묻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만족을 위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삶의 지점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이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삶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보니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행복을 위한 선택이 때로는 서로 부딪히고, 누군가의 행복이 다른 누군가의 슬픔으로 이어진다면, 과연 그 행복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림책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은 선녀와 결혼하기 위해 선녀 옷을 감춘다. 잠시 선녀는 목욕을 하러 내려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함께 살게 된다. 나무꾼은 행복했는지 몰라도, 선녀는 어땠을까? 물론 행복한 순간도 있었겠지만, 돌아가지 못한 하늘나라와 가족을 늘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옷을 되돌려 받자마자 곧장 하늘로 올라갔겠지.
사슴이 말한 “아이를 넷 낳기 전까지 선녀 옷을 돌려주지 말라”는 조언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넷은 안고 업고 해도 다 데려갈 수 없으니, 애초에 선녀가 다시 하늘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선녀의 동의 없이 나무꾼이 만든 것이었고, 나무꾼 혼자만 만족하는 행복이었다. 선녀의 마음에서 나무꾼은, 어쩌면 그녀의 선택권을 빼앗아간 존재에 더 가깝지 않을까?
결국 나무꾼은 선녀를 찾아 하늘나라로 갔지만, 이번에는 땅에 남은 어머니가 그리워 다시 내려오고 만다. 선녀와 아이들을 찾아 하늘나라로 가면, 어머니가 어찌 지내실지 생각하지 않다. 하늘나라에 가서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잠시만 뵙고 올라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결국 돌아가지 못한다. 선녀와 아이들은 하늘나라에서 남편과 아빠 없이 살아가야 한다. 땅에 남은 어머니는 다시는 며느리와 손자들을 볼 수 없게 된다. 결국 나무꾼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고 한 선택들은, 서로에게 아쉬운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내 삶에서 ‘나의 행복과 만족’은 중요하다. 타인이 그것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 또한 타인의 행복이나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 개인’과 ‘사회 속의 내’가 조화를 이루는 사람, 내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의 행복도 함께 고려할 줄 아는 사람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