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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Nov 23. 2024

학교 보건실에서 걸려온 전화

오늘도 한고비 넘기고 경험치 +1 획득한 워킹맘 이야기


"여보세요. 지운이어머니 전화 맞으신가요? 미래초등학교 보건실입니다."

순간 등골이 싸늘해진다.

올 것이 온 것인가. 아침부터 싸했던 내 느낌은 언제든 틀린 적이 없다. 쓸데없이 촉은 좋아가지고.


"아..안녕하세요 선생님. 지운이가 혹시 아픈가요?"

"네 어머니, 두통이 있어서 보건실에 왔는데 열을 재어보니 39도 가까이 되네요. 오셔서 병원 한 번 데려가셔야 할 것 같아요."

느낌은 안 좋았지만 진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하고 씩씩하게 출근했는데 실제로 전화를 받고 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금방 다시 전화드린다고 하고 우선 전화를 끊은 후 오늘 아이를 어디에 부탁할 수 있을지 짱구를 굴려본다.

오후에는 회사에서 그동안 준비했던 중요한 보고가 있고, 하필 오늘은 팀장님이 연차를 쓰셨다. 나와 같은 업무를 하는 동료도 오늘 연수를 갔고. 

개인 연차 사용이 눈치는 보이지만, 본인이 쓴다면 막지는 않는 회사라 사실 나갈 수는 있으나 내 일을 대체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1년에 몇 번 안 되는 그날이었다.

왜 중요한 일은 이렇게 겹쳐서 생기는지. 평소에는 할만하다가도 이런 날이 되면 워킹맘인 게 이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다. 아이가 아픈데 당장 달려가지 못하는 엄마라니.



사실 어젯밤부터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드문드문 기침을 했는데 어제는 가래가 목에 딱 걸린 느낌, 아니 어쩌면 더 깊은 곳부터 나오는 탁한 소리라는 걸 10년 차 엄마인 나도 이젠 들으면 안다.

이제 조금 커서 병원 안 가고도 간단한 기침 콧물은 약국약으로 근근이 막아올 수 있었는데, 이번엔 안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 이번 주 보고만 끝나면 한숨 돌릴 수 있으니 조금만 더 버티고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다고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기침소리였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느님 저 좀 도와주세요'하는 마음의 외침과 함께 체온계를 아이 귓속에 넣어본다. 성당 안 나간 지 십수 년인데 이 순간마다 떠오르는 건 왜 하느님 아버지뿐일까. "남편, 도와줘"라는 말보다 하느님 아버지부터 찾고 보는 나도 참 간사한 인간이다.

37.5도. 기초체온이 높아 평소에도 37.1~2도 가 나오는 아이라 이 순간 이건 열이 아니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괜찮아질 거라는 마음의 위로를 나에게 던지고 아이 마스크를 씌워 등굣길, 출근길에 나섰던 아침이다. 

"지운아. 37.5도는 열나는 건 아니야~ 오늘 금요일이니 씩씩하게 친구들이랑 놀고 학교 마치면 전화해 줘~"

아이도 두 눈 뜨고 체온계를 보고 있었기에 학교 안 간다고 생떼를 쓸까 걱정되어 내가 먼저 괜찮다는 말로 선수를 쳐서 등교거부를 간신히 막았다.

아이는 '나 조금 아프긴 한데...' 긴가민가하면서 교문으로 걸어갔는데, 다행히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저 멀리서 오는 걸 보고는 언제 아팠냐는 듯 깡충 뛰며 뒤도 안 돌아보고 학교로 들어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출근했는데 학교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전화를 여기저기 돌려보니 멀지 않게 사시는 시어머니께서 오늘은 시누이네에 조카를 봐주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집에 계셨다. 좋아하는 운동도 김장 때문에 하루 쉰다고 하셨다. (김장아 고맙다.)

회사에서 준비한 발표시간이 두 시간여 남았으니, 지금 어서 뛰어나가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시댁에 데려다 놓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보건실에 30분 안에 가겠다고 전화를 걸면서 사무실에서 서둘러 뛰어나왔다. 나오는 길에 발이 시려서 내려보니 신발도 갈아 신지 않은 채 회사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걷고 있네? 코트를 걸치지 않은 건 당연한거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들 겨울옷을 입고 걷는데 나만 여름 같은 모습을 하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래도 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나는 차를 가지고 출근을 했고, 회사는 아이 학교와 30분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신호 빨도 어찌나 잘 받는지 내가 다가가면 빨간불도 초록불로 바뀌었다. 

역시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 딱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나에게 어려운 미션을 던져주는 기똥찬 인생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 한 번도 학교에서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고, 갑자기 다친 적도 없었다. 이렇게 편하게 워킹맘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건 주변의 많은 환경이 날 도와줘서였던 것이다. 아이가 특별히 많이 아픈 적이 없었기에 일상에 있는 행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기고 있었다.


보건실에 도착하니 열이 많이 났는지 입술이 하얗게 텄고, 엄마 얼굴을 보더니 기분이 나아졌는지 살짝 미소를 보인다.

"엄마가 학교에서 보건실을 못 찾아서 헤매고 있는지 알았잖아. 엄마가 길치니까 내가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나 많이 아팠다구. 그리고 엄마, 보건선생님이 그러시는데 37.5도는 미열이 아니래. 중열이래. 난 중열이 났는데도 오늘 학교에 왔던 거야."

투정 섞인 애교를 부리는 우리 지운이. (중열은 또 뭐람. 뭘 듣긴 들었는데 제대로 안 들은 것 같다.)

더 빠르게 오지 못해서, 아침에 아픈데도 회사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교문 안으로 밀어 넣어서 미안한 마음에 오늘도 한번 꽉 안아준다. 열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낸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두번째는 더욱 세게 껴안아 준다.


시댁에 아이를 보내고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그제서야 생리통으로 엄청난 통증이 몰려와 배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너무 아팠는데, 약 먹을 시간을 놓쳐 진통제도 먹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서인지 고통이 한 번에 몰아친다. 아픈 아이 생각하느라 잠시 아픔을 잊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발표 시간은 한 시간이 넘게 남아있고, 통증이야 두 알 삼키면 줄어들 거니까.

우리 아이가 아플 때 데리러 갈 수 있었고 따뜻하고 안전한 할아버지댁에 들여보낼 수 있었으니까.

오늘도 서툰 워킹맘은 이렇게 겨우겨우 장애물을 하나 뛰어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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